유형원

유형원

[ 柳馨遠 ]

요약 조선 중기의 실학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며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다.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중농사상에 입각한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유형원 선생 묘

유형원 선생 묘

출생-사망 1622 ~ 1673
본관 문화(文化)
덕부(德夫)
반계(磻溪)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서울
주요저서 《반계수록》,《군현제(郡縣制)》

본관 문화(文化). 자 덕부(德夫). 호 반계(磻溪). 서울 출생.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고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 사사하였고,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 23세 때 할머니 상(喪)을 당하고, 27세에 어머니 상, 30세 때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후 9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지평(砥平)·여주(驪州)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러한 환경변화는 사상과 생활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653년(효종 4)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학문은 성리학·역사·지리·병법·음운(音韻)·선술(仙術)·문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 필요하였다.

이에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兼倂)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祿俸制)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뒷날 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위의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 1권이 전할 뿐이다. 호조참의(戶曹參議)·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유형원 연보
출생 1622~ 사망 1673

1622

서울에서 출생.

1623

아버지 유흠이 역적으로 몰려 옥사.

1626

조부 밑에서 자라며 외숙 이원진과 고보부 김세렴에게 수학.

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원도 원주로 피난.

1652

반계수록》 집필을 시작.

1653

부아현 우반동에 정착.

165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며 전국을 유람.

1665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

1673

우반동에서 사망.

1770

영조가 경상관찰사에게 《반계수록》의 목판인쇄를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