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병법

[ 兵法 ]

요약 넓은 뜻으로는 모든 인적(人的) ·물적 조건을 포함하여 전개되는 전쟁수행의 방법.

전술(戰術) ·전법(戰法) ·병술 ·병도(兵道) 및 군술(軍術) 등의 동의어가 있다. 좁은 의미로는 고대 중국에서 발달한 용법(用兵)의 학문을 뜻하며 대개의 경우 병법이라 하면 이 좁은 의미의 병법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중국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로서 병법을 강의하는 병법가(兵法家)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날로 내전(內戰)이 격화됨에 따라 자연 그 필요에 의하여 발달한 전략 ·전술의 학문이다. 단, 중국 병서의 가탁(假託)이 많아 그 일례를 들면 《육도(六韜)》는 태공망여상(太公望呂尙)의 작이라 하고, 《삼략(三略)》은 신인(神人) 황석공(黃石公)의 작이라 하나 실은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전해진다.

비교적 확실하게 전해지는 병법서로는 춘추 오(吳)나라 손 무(孫武)의 작이라는 《손자(孫子)》와, 전국시대 초(楚)나라 오기(吳起)의 작이라는 《오자(吳子)》 및 제(齊)나라 전양저(田穰苴)의작이라는 《사마법(司馬法)》의 3서(書)가 있다. 그 중에서도 《손자》는 병법서의 대표적인 것으로, 전쟁이론의 체계를 세워 후세에 병법의 원조(元祖)로서 추앙되고 있다. 또 《손자》 《오자》를 합쳐 ‘손오의 병법’이라고 하는데, 이 두 책도 후세의 위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래로 중국에서는 무공(武功)보다는 문덕(文德)을 중히 여겨,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였으나, 그것은 무저항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인의(仁義)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인정되어 왔다.

무(武)라는 글자는 과(戈:槍)와 지(止)의 두 자를 합친 것으로 과(戈), 즉 싸움을 중지시키는 것이 무(武)라고 해석되듯이, 강력한 무비(武備)를 갖춤으로써 싸우지 않고 적에게 이기는 것을 최상의 수단으로 여겨 왔으며, 그 때문에 무(武)는 문(文)과 함께 덕(德)의 일종이고, 병법은 위정자가 알고 있어야 할 술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평화주의자인 묵자(墨子)도 그의 저서 《묵자》의 노문(魯問) 제49 이하는 병서로 되어 있다. 한(漢)나라 말기의 조조(曹操)도 병법을 좋아하여 《손자》에 주석을 가하고, 또 《병서첩요(兵書捷要)》(7권)를 저술하였다. 같은 시대의 제갈 양(諸葛亮:孔明)도 후세에 신비적인 병법가로 존경받고 있으며, 송(宋)나라 때는 요(遼)와 서하(西夏)에 대한 무비의 필요에서 병서가 열심히 읽혀져, 《손자》 《오자》 《사마법》 《육도》 《삼략》 외에 다시 《울요자(尉繚子)》와《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더하여 ‘무경7서(武經七書)’라 칭하였고, 인종(仁宗) 때는 증공량(曾公亮) 등에게 명하여 《무경총요(武經總要)》(40권)를 편찬시켰다. 이 책은 군사학의 백과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특히 화약에 관한 최초의 지식을 전한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명대(明代)에 와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침입에 대비하여 병학은 더욱 성행하였고, 그 중에서도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 《연병실기(練兵實紀)》는 실전의 경험을 기초로 하였으며 병법은 군대의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 하여 그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 밖에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는 가장 완벽한 병법서로, 군기(軍器) ·병선(兵船) ·진형(陣形) 등의 도해(圖解) 외에도 풍부한 지도가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청(淸)나라에 들어와서는 병법상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을 평정한 그들로서는 한인(韓人)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청나라 말기 서양의 무기와 전술을 수입한 이홍장(李鴻章) 등의 군벌이 실권을 잡게 되자 구(舊)병법은 문자 그대로 무용장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