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학사상

병학사상

[ 兵學思想 ]

요약 용병·전법·전략을 연구하는 학문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나 견해.

넓은 뜻으로는 전쟁·전투의 준비와 이의 수행에 관련된 군사제도·기술지도를 대상으로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용병면에서 군사지도(전략·전술·병참)의 법칙성 탐구에 한정된다.

이와 같은 병학의 발단은, 고대중국(손자·오자의 병법서)이나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체계적인 사상으로서의 전개는 근대유럽에서 이루어졌다. N.마키아벨리(1469∼1527), S.L.P.보뱅(1633∼1707), H.E.로이드(1729∼1783), J.A.de기베르(1743∼1790), F.W.뷜로(1755∼1816) 등을 거쳐서 나폴레옹전쟁 때의 이론가 K.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1832∼1834)과 A.H.조미니의 《전쟁술에 대해서》(1837)에 의해, 일단 완성을 보게 된다. 그 후에도 H.몰트케(1800∼1891), F.포슈(1851∼1923), A.슐리펜(1833∼1913), J.E.C.풀러(1878∼1966), B.M.리델하트(1895∼1970) 등이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병학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핵전쟁에서 게릴라전에 이르는 다양한 전쟁형식의 이론적 고찰이 계속되어 왔다.

또한, 병학사상의 근간은 육전(陸戰)뿐 아니라 해 ·공전에 있어서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이론가가 클라우제비츠와 조미니이다.

18세기 말까지의 병학사상은 보병 ·기병 ·포병의 적절한 안배와 운용, 야전과 요새전, 병참적인 제한하에서의 군대의 훈련 등과 같은 여러 문제를 다루어왔는데, 새로운 규모의 군사동원과 기술혁신을 이룩한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과제를 남겨놓았다.

그 과제의 첫째는, 정치지도와는 구분이 되는 독자적인 군사지도의 경계획정인데, 이로써 고유한 의미의 병학이 자리잡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와의 관계가 끊임없이 검토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의 절대적인 우위를 주장한 클라우제비츠, 개전과 종전만을 정치의 판단에 맡기고 나머지 모든 군사적 판단은 군인의 권한이라고 생각한 몰트케, 전쟁지도상의 요청에 정치의 모든 것을 종속시키려고 시도한 루덴도르프 등, 이와 같은 차이점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두번째 과제는, 정치와 구별된 병학고유의 기초원리를 어떤 방법론에서 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지도가 역사적 ·사회적인 규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 항구적인 병학원리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조미니와 그의 영향을 받아 해군전략을 만든 A.T.마한 등은, 그 어떤 경우에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을 도출해 내기 위하여, 사회적 변동으로부터 독립된 병학원리의 발견에 주력하였다. 이것은 병학을 단지 술(術)로 보느냐, 과학으로서 구축 가능한 학문으로 보느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상과 같은 전제하에서, 전략과 전술,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 공격과 방어, 기동전과 진지전, 섬멸전과 지구전, 정규전과 비정규전, 더 나아가서는 육 ·해 ·공군 간의 비중, 병종(兵種)의 여러 가지 조합문제를 병학사상에서 다루고 있다. 어디에 역점을 두고서 체계적인 종합성을 얻느냐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특정한 시점에서의 국제환경이나 국내상황에 따라서 용병상의 일정한 원칙을 정하는 일이 많으며, 이것은 군사적 독트린으로서 병학사상의 뼈대를 이룬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상전 ·심리전 ·경제전과 같은 고전적인 병학의 범위를 벗어난 여러 분야가 전쟁지도 영역에 포함되어, 정치와 군사의 전통적인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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