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

홍대용

[ 洪大容 ]

요약 조선 후기 문신으로 북학파(北學派)의 선구자이며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등 개혁사상을 주장했다.
홍대용 선생 생가지

홍대용 선생 생가지

출생-사망 1731 ~ 1783
본관 남양(南陽)
덕보(德保)
담헌(湛軒)·홍지(弘之)
주요저서 《담헌서(湛軒書)》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홍지(弘之)이다. 1731년(영조 7) 음력 3월 1일 충청도 천원군 수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홍력이며,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김방(金枋-청풍 김씨)의 딸이다.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1774년(영조 50) 음보(蔭補)로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고, 이듬해 선공감(繕工監) 감역을 거쳐 1776년 사헌부 감찰, 1777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정조 4) 영천군수가 되었다.

어려서 학문은 석실서원의 유학자 김원행(金元行)에게서 배웠으며 수학, 천문학 등 과학분야에 상당한 학식을 쌓았고 노장(老莊), 불교, 양명학 등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유연한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성장하면서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과 깊은 친교를 맺으면서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65년(영조 41)에는 숙부인 억(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하여, 베이징[北京]에서 청나라의 학자인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면서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이들과는 귀국 후에도 서신 교환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유하면서 청나라 학문을 받아들였다. 당시까지도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하면서 청의 문물을 배격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청을 비롯한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선교사로 머물고 있던 독일 사람인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劉松齡],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과 필담으로 면담했으며, 관상대(觀象臺)를 견학하여 천문(天文) 지식을 넓혔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하였는데 《담헌서(湛軒書)》가 대표적이고, 독일인과의 필담 내용은 《유포문답(劉鮑問答)》으로 정리하여 기록을 남겼다. 특히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근대 서양 과학사상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북경 방문은 그에게 학문세계를 열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북경에서 보고 들은 것이 모태가 되어 북학사상의 근원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별의 철폐와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교육기회의 균등부여 등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나아가 동양의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면서 모든 나라들이 중심임을 강조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수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저술하는 등 사회사상가이자 과학사상가로서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다.

그의 저서로는 《담헌서(湛軒書)》를 비롯하여 편서(編書)에 《건정필담(乾淨筆談)》,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등이 있다.

홍대용 연보
출생 1731.3.1~ 사망 1783

1731

3월 1일(음력) 충청도 천원군에서 출생.

1765

숙부인 억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

1774

음보로 세손익위사시직을 지냄.

1776

사헌부 감찰을 지냄.

1780

영천군수를 지냄.

178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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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선생 묘

홍대용 선생 묘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