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파

기호학파

[ 畿湖學派 ]

요약 조선 중기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이(李珥)·성혼(成渾) 학파를 통칭한 말.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해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이·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분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 볼 때 기호학파는 서인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서경덕(徐敬德)처럼 기호지방(개성)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북인(北人)으로 나간 인물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기호학파가 정치적으로 곧 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연산(連山)·회덕(懷德)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학파는 정계·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김장생·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