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훈구파

[ 勳舊派 ]

요약 조선 초기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을 이르는 용어.

훈구파란 성종 때 이후 등장한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士林派)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오랜 기간 왕 옆에서 관리로 있으면서 공을 많이 세웠다는 의미의 일반 용어였으나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정치권을 장악한 정치집단을 이르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관학파라고도 한다. 이 세력들은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업적을 남겼고,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였으며,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으로는 사장에 치중하여 성리학 본연의 철학적인 면은 소홀하였다.

훈구파 본문 이미지 1
사림무오사화갑자사화기 묘사화을사사화훈구파

어린 단종으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빌어 왕위에 오른 세조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이나 금성대군의 역모사건 등의 시련을 거치면서 자신의 정권교체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1453년의 정난공신(靖難功臣)과 1455년의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오른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정창손(鄭昌孫)·최항(崔恒)·구치관(具致寬) 등은 국가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부여받아 대토지를 소유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정부의 요직인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인사권과 병권(兵權)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한명회는 직전과 공신전 등을 합하면 총 820결, 신숙주는 690결, 정인지는 570결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들은 세조 말년 발생한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등장한 신진 세력인 남이(南怡) 등에게 한 때 정치적 도전을 받았으나, 유자광(柳子光)의 고발로 남이가 제거된 이후에는 더욱 정치 권력화가 강화되면서 권귀화(權貴化)하였다.

나이 어린 성종이 즉위한 이후 세조 비에 의해 섭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훈구세력의 권력독점은 보다 강화되었고, 1471년(성종 2) 이루어진 좌리공신(佐理功臣) 책봉과정에서는 더욱 많은 수의 훈구세력이 양산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 성장한 인물들도 다수 존재하며, 훈구세력 가문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보다 강화하여 나갔다. 그리하여 정치권력의 비대화와 집중화 경향을 보이면서 세습적 지위를 확보해갔다.

이들은 왕권 강화를 추진한 성종에 의해 등용된 사림세력의 도전을 받으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대립 국면을 조래하였고, 그 결과 조선 중기 사화(士禍)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