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김종직

[ 金宗直 ]

요약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김종직 점필재문집 및 이존록 목판

김종직 점필재문집 및 이존록 목판

출생-사망 1431 ~ 1492
본관 선산(일선)
계온 ·효관
점필재
시호 문충
활동분야 정치, 학문
출생지 경남 밀양
주요저서 《유두유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일선 一善)이다. 자는 계온(季昷)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3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부친 김숙자의 막내로 태어났다. 성리학에 밝았던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히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453년(단종1) 23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김종직의 벼슬은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조선초 성리학을 이룬 대학자로 평가되었다.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김종직은 공자맹자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도학정치를 펼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훈구파 세력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훈구파의 거물급이었던 이극돈(李克墩)에게 발각되었고 같은 훈구파 세력이었던 유자광 등이 주도하여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글이었다. 이 사건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들과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되자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고 숙종(肅宗) 때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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