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유자광

[ 柳子光 ]

요약 조선 전기의 대신. 서얼 출신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예종 때에는 ‘남이의 옥’을, 연산군 때에는 무오사화를 주도하며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출생-사망 1439 ~ 1512
본관 영광(靈光)
우후(于後)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시대 조선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字)는 우후(于後)이다. 부윤(府尹)을 지낸 유규(柳規)의 서자(庶子)로 전라도(全羅道) 남원부(南原府)에서 태어났으며 모친은 최씨(崔氏)이다.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오성군(筽城君) 유자환(柳子煥)의 서제(庶第)이다. 함양호장(咸陽戶長)을 지낸 박치인(朴致仁)의 딸과 결혼하여 유방(柳房)과 유진(柳軫) 등을 낳았다.

1467년(세조 13) 왕실의 호위병인 갑사(甲士)로 있다가 하번(下番)하여 고향인 남원에 머무르고 있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에게 상서(上書)하여 자진하여 출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글을 보고 기꺼워한 세조는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이시애를 토벌할 방략을 묻고는 왕을 호위하는 겸사복(兼司僕)으로 충원하였다. 유자광은 몸이 날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뿐 아니라 문장과 학식에도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세조가 유자광의 무예를 시험하고는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렇게 세조의 총애를 받은 유자광은 선략 부호군(宣略副護軍)으로 임명되어 함길도로 가서 왕의 명령을 도총사 이준(李浚)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래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온 뒤에 정5품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얼 출신인 유자광을 6조의 낭관(郎官)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세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억누르고 직접 예조(禮曹)에 명하여 그의 등용을 허통(許通)하게 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반발에 부닥친 유자광은 병든 모친을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갔는데, 세조는 그에게 약을 내려주고 휴가와 역마를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8년(세조 14)에 세조는 세자와 함께 온양(溫陽)으로 행차할 때 그를 다시 불러들여 총통장(總筒將)으로 임명해 자신을 호위케 하였다. 그리고 유자광을 온양에서 실시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케 하여 장원으로 선발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임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유자광의 책문(策文)은 신숙주(申叔舟)가 선발한 합격자의 글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세조가 직접 그의 글을 1등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이 즉위하자 유자광은 왕실의 종친(宗親)이던 겸사복장(兼司僕將) 남이(南怡)가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강순(康純) 등과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여 이른바 ‘남이의 옥(獄)’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유자광은 정난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고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남이의 집과 강순의 아내 중비(仲非), 민서(閔敍)의 딸 민말금(閔末今) 등을 받았다.

‘남이의 옥’ 이후 유자광은 예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유자광은 1469년(예종 2) 위장(衛將)인 응양장군(鷹揚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예종은 그해에 유자광의 동모제(同母弟)인 유자형(柳子炯)이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생원시 응시가 가로막히자 직접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라고 명했으며, 유자광의 아버지인 유규에게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의 벼슬을 내렸다.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한 1470년(성종 1)에 유자광은 난언(亂言)을 하였다고 자신의 수행원인 박성간(朴成幹)에게 고발되어 국문(鞫問)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성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세조의 비 정희대비(貞熹大妃)는 오히려 유자광을 석방하도록 이르고, 박성간을 의금부(義禁府)로 보내 극형(極刑)에 처했다.

이처럼 성종 때에도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유자광은 1472년(성종 3)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성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직접 그를 불러 이를 무마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총괄하는 도총관(都摠管)으로 임명하였다. 당시에도 조정 대신들은 그가 서얼 출신임을 내세워 그를 궁궐을 방위하는 금군(禁軍)의 최고책임자인 도총관으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성종은 유자광에 대한 신임을 내보이며 그를 도총관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478년(성종 9) 유자광은 현석규(玄碩圭)를 탄핵하다가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붕당(朋黨)을 이루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오히려 경상도(慶尙道)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성종은 그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아 이듬해 유배되어 있던 그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돌려줄 것을 명하기도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유자광은 1480년(성종 11) 병든 모친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성종에게 탄원하여 남원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그리고 1485년(성종 16) 서용(敍用)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다.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 유자광은 1486년(성종 17) 정조사(正朝使)로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487년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홍치제(弘治帝, 재위 1487~1505)의 즉위에 맞추어 명나라로 파견된 사절단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다녀왔다. 1488년(성종 19)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유자광은 성종에게 의주(義州)·동팔참(東八站)·요동(遼東)·광녕(廣寧) 등지의 산천과 도로의 형세를 나타낸 지도를 바치며 북방의 방어를 위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간언하였다. 그리고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역대명신법첩(歷代名臣法帖)》도 바쳤다.

1489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 임명된 유자광은 성종이 죽고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이 즉위한 1494년(연산군 1)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497년(연산군 3)에 다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인 1498년(연산군 4)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을 내세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주도하였다. 그해에 유자광은 숭록무령군(崇祿武靈君)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폐비에 찬성했던 이극균(李克均,1437~1504)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충군형(充軍刑)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06년 복직된 유자광은 그해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반군이 궁궐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왔다. 이때의 공으로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 즉위한 뒤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어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1507년(중종 2) 관직의 최고 품계인 대광(大匡)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유자광은 김종직의 여당(餘黨)이 자신을 중상하려 한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예견처럼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 (士林) 세력은 유자광을 탄핵하였고, 중종은 결국 이를 받아들여 유자광을 평해(平海)로 유배하였다. 유자광의 아들인 유방과 유진, 손자 유승건(柳承乾), 유승곤(柳承坤) 등도 모두 유배되었다.

유자광은 1512년(중종 7)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유방도 스스로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중종은 유자광이 죽은 뒤에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령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유자광은 1908년(순종 1)에야 죄명을 벗고 원래의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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