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

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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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9년 11월 14일, 인도 알라하바드
사망 1964년 5월 27일, 뉴델리
국적 인도

요약 의회정치를 실시했으며 외교에 있어서는 중립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18세기에 인도로 이주한 카슈미르 지방의 브라만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많은 관료와 학자들을 배출했다. 네루는 명망있는 법률가였으며 마하트마 간디 의 탁월한 보좌역이었던 모틸랄 네루의 2남 2녀 중 장남이었다. 여동생 비자야 라크슈미 판디트 는 최초의 국제연합(UN) 총회 여성의장이 되었다. 네루는 스스로 인도인임을 강조했지만 간디에 가까운 분위기나 힌두교적인 색채를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현대적인 정치·경제관은 인도의 젊은 지식인 계급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이끌었고 인도가 자주독립국이 된 이후에는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년기
  3. 정치가로서의 성장
  4. 독립운동
  5.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투옥
  6. 총리시절
  7. 평가
네루(Jawaharlal Nehru)
네루(Jawaharlal Nehru)

개요

의회정치를 실시했으며 외교에 있어서는 중립정책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년기

18세기에 인도로 이주한 카슈미르 지방의 브라만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많은 관료와 학자들을 배출했다.

네루는 명망있는 법률가였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탁월한 보좌역이었던 모틸랄 네루의 2남 2녀 중 장남이었다. 여동생 비자야 라크슈미 판디트는 최초의 국제연합(UN) 총회 여성의장이 되었다.

16세 때까지 덕망높은 인도인 교사로부터 힌디어와 산스크리트를 습득하는 한편, 영국인 여자 가정교사들과 개인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그들 가운데 아일랜드와 벨기에 혼혈이었던 신지론자(神智論者) 퍼디낸드 브룩스가 약간의 인상을 남긴 듯하다. 1905년부터 2년간 영국의 명문 해로 학교에 다녔으나 학업성적이 특출한 것은 아니었다.

해로를 졸업한 뒤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고 자연과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으며 3년간 수학했다. 케임브리지를 나온 뒤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의 시험성적은 뛰어날 것도 형편없을 것도 없는 그런 정도였다고 한다. 인도에 귀국한 지 4년이 지난 1916년 3월 델리에 살고 있던 카슈미르 혈통의 처녀 카말라 카울과 결혼했고 1917년 그들의 외동딸 인디라 프리야다르시니(결혼 후의 이름은 인디라 간디)가 태어났다.

그녀는 뒤에 인도 총리가 된다.

정치가로서의 성장

처음 인도로 돌아와서는 변호사 개업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달리 변호사라는 직업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법률업무 자체나 동료 법률가들과의 교제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대다수가 그러했듯이 구체적인 실현방법들을 확립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던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국내정치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은 인도 독립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간디를 만나고 그의 정치적 행로를 따르기 전까지는 독립의 구체적인 실현방법들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네루 부자에게 감동을 준 것은 간디의 행동주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불의는 비난해야 할 뿐 아니라 항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루 부자는 대부분의 인도 정치인과 그들의 민족주의를 경멸했는데, 인도 독립에 대해 지리멸렬한 해결책을 내세우며 장황한 연설들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판디트 네루는 공포와 증오의 감정 없이 영국과 투쟁할 것을 주장한 간디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1916년 러크나우에서 열린 인도국민회의당 연례집회에서 그보다 20년 연상인 간디를 처음 만났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 듯하다. 1929년 네루는 국민회의당 라호르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인도 정치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라호르 대회는 '자치령화'라는 종전의 정치목표를 '완전한 독립'으로 새로이 선포한 역사적인 전당대회였다.

국민회의당과의 인연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민족주의의 저항이 대단히 왕성했으며 1919년 4월의 암리차르 대학살로 영국의 탄압도 절정에 달했다(암리차르 대학살). 암리차르 대학살은 영국군 지역사령관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 있던 비무장의 인도인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는데, 이사건으로 379명이 죽고 1,200명 이상이 다쳤다.

1921년말 인도의 몇몇 주에서는 국민회의당의 주요지도자와 당원들의 활동을 불법화시켰다.

네루는 이때 처음으로 투옥된 이래 24년간 8차례에 걸쳐 수감되었으며 최후이자 가장 오랜 감옥생활은 1945년 6월까지 3년간 투옥된 것이었다. 그는 도합 9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했다. 네루는 자신의 감옥생활을 "비정상적인 정치활동으로 점철된 인생의 정상적인 간주곡"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1919~29년 국민회의당에 참여하면서 정치가로서 성장하게 된다.

1923년부터 2년 동안 국민회의당의 총서기를 지냈고 1927년부터 2년간 다시 총서기직을 맡았다. 직무상 필요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도 하여 인도 곳곳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고향인 연합주에서 농민들의 극심한 빈곤과 비참한 생활을 처음으로 접하고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들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네루는 다소간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띠었으나 급진주의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의 정치적·경제적 사고에 분수령이 된 사건은 1926~27년 유럽과 소련을 여행한 일이었다.

이 여행으로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대하여 특별히 알게 된 것은 없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 비로소 움트게 되었으며 감옥생활중에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흥미를 느꼈으나 일부 방법론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었던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마치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다만 경제적 사고의 척도가 되어 인도 상황에 맞게 원용했다.

독립운동

그는 1929년의 라호르 대회 이후 인도의 지식인과 청년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노련한 정치가인 간디는 네루가 극좌로 흐르고 있던 청년들을 포섭할 것으로 기대하며 연장자들을 제치고 그를 인도국민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네루에게 더욱 막중한 임무를 부여한다면 그가 중도노선을 지키리라고 계산했는데 이것이 적중했다. 193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국민회의당의 핵심조직으로 들어간 네루는 간디와 더욱 긴밀해졌다. 간디는 1942년에야 그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하지만 네루는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간디의 후계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1931년 간디와 영국 총독 어윈 경(뒤의 핼리팩스 경) 사이에 조인된 간디-어윈 협약은 인도의 양대 세력간의 휴전을 의미했는데, 1930년에 시작되어 네루가 체포되기까지 했던 시민불복종운동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디-어윈 협약으로 인도-영국 관계가 좀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윌링던 경(1931년 어윈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됨)은 1932년 1월 간디가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그를 투옥했다. 그의 혐의는 또다시 시민불복종운동을 기도했다는 것이었고 네루 역시 체포되어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인도의 자치를 진전시킬 목적으로 개최된 원탁회의의 결과 1935년 '인도통치법'이 나왔는데, 인도의 주에 자치정부를 세운다는 내용으로 나아가서는 이렇게 성립된 자치주들과 여러 왕국들 사이에 연방을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인도의 연방화는 실패했으나 주의 자치는 실현되었다. 1930년대 중반 네루는 유럽 정세가 두번째 세계대전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 1936년초, 그는 아내 카말라의 요양차 유럽에 머물렀으나 그녀는 얼마되지 않아 죽게 된다. 네루는 이러한 시기에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인도는 민주국가들 편에 설 것임을 강조했다. 다만, 그의 주장에는 인도가 독립국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주의 자치가 이루어진 후 실시된 선거의 결과 국민회의당이 대다수의 주에서 승리하자 네루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모하메드 알리 진나(후일 파키스탄을 건국한 인물)가 이끄는 인도 이슬람 동맹당이 선거에서 대패했고, 국민회의당은 몇몇 주에서 네루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민회의당-인도 이슬람 동맹당 연합정부를 형성하자는 진나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국민회의당과 인도 이슬람 동맹당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이것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으로 굳어져 인도의 분열과 파키스탄의 건국이라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투옥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총독 린리스고가 자치주 정부들과의 협의도 없이 인도의 참전을 결정하자 국민회의당 최고 지도부는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국민회의당 당원들을 주정부로부터 사퇴시켰고 정치권을 진나와 인도 이슬람 동맹당에 넘겨주는 판단착오를 했다.

네루와 간디는 세계대전에 대하여 상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간디는 영국을 지원한다면 이는 조건이 없어야 하고 또한 비폭력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네루는 침략에 대한 대항으로서 비폭력은 무의미하며 나치즘과의 전쟁에 영국과 함께 참전해야 하지만 인도의 독립이 그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돕지 못한다면 방해는 말아야 한다고 했다.

1940년 10월 간디는 애초의 주장을 포기하고 제한적 시민불복종운동을 벌이기로 했고 동참을 권유받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하나 둘 이에 가담했다.

네루는 이때 체포되어 4년형을 언도받았으나 1년여 투옥되었다가 일본의 진주만 공격 3일 전에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일본군이 미얀마를 침공하고 계속해서 1942년 봄 인도국경에까지 진출하자 영국 정부는 새로운 군사적 위협에 당면하여 인도에 새로운 제안을 하고자 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네루와 정치적으로 가깝고 진나와도 절친했던 전시내각의 스태퍼드 크립스경을 파견하여 인도 헌정문제에 대한 해결안을 제시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크립스). 간디가 독립 이외에 어느 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국민회의당의 주도권은 영국인들이 인도를 떠날 것을 요구하는 간디에게 넘어왔다.

네루는 연합군의 전투력을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면서도 간디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 8월 8일 국민회의당이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서 영국의 인도철수결의안을 통과시킨 이후, 간디와 네루를 비롯한 국민회의당의 전(全)실무위원들이 체포·구금되었다. 네루는 1945년 6월 15일에야 이 마지막이자 9번째의 구금상태에서 풀려났다.

인도는 2년 내에 분리·독립되었다.

국민회의파와 인도 이슬람 동맹당을 화해시키려는 총독 웨이벌경의 마지막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 처칠의 전시내각을 대체하고 들어선 노동당 내각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내각의 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는 일이었으며 총독을 웨이벌 경에서 마운트배튼경으로 교체한 것이었다. 남은 문제는 인도의 독립 여부가 아니라 인도가 하나의 국가로 독립하느냐 아니면 여러 개의 국가로 독립하느냐에 있었다. 간디는 인도의 분리독립을 거부했고 네루는 달가와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인 견지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은 2개의 독립국가가 되었으며 네루는 자주독립국 인도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총리시절

1929년 라호르 국민회의당 대회에서 간디가 의장으로 지명한 이후 1964년 총리 재임중 사망할 때까지 네루는 국민의 영웅이었다.

표면적으로 네루와 간디는 대조적이었다. 간디는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태도를 가졌고 네루는 비종교적·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인도 정치에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고 오해받고 있는 간디는 오히려 힌두교를 세속화하려고 노력했던 사회개혁가였다. 네루와 간디 두 사람의 진정한 차이점은 종교관이 아니라 그 문명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루가 점진적 근대화의 이상을 추구한데 비해 간디는 고대 인도의 영광을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간디는 힌두교라는 틀 속에서 그 틀 밖에 있던 네루 못지않게 개혁주의자였다. 정통 힌두교도의 시각으로는 두 사람 모두 힌두교를 보는 눈이 세속적이었으며 둘 다 힌두교 이외의 여러 종교들을 존중했다.

인도 역사에 있어서 네루가 갖는 중요성은 그가 인도에 새로운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도입하여 인도의 사정에 맞게 변용·이식했다는 점에 있다. 네루는 인종적·종교적 다양성의 조화와 비종교주의에 대한 강조 이외에도 인도를 발달된 과학·기술의 세계로 이끌어가고자 골몰했으며,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 빈민과 천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필요성과 민주적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의식을 심었다.

네루가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고대 힌두 민법의 개정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힌두교 미망인들은 유산과 재산문제에 있어서 남자와 동일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여성).

1956년의 헝가리 봉기에 대한 태도로 그의 비동맹외교노선이 의심을 사기 전까지 국제적으로 네루의 인기는 상승세에 있었다. 인도는 유엔에서 소련의 침공을 지지한 유일한 비동맹국가였으며 네루의 비동맹노선은 더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독립 초기 네루는 반식민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았으나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모였던 반둥 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선수를 빼앗긴 이후 관심이 저하되었다. 네루는 1961년 비동맹국가의 베오그라드 회의에서 개발도상국들의 최우선 과제로 반식민주의 대신 비동맹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1962년 중국은 오랫동안의 국경분쟁 끝에 브라마푸트라 계곡 침공을 획책했다. 네루는 비동맹노선을 사실상 저버리고 서방에 원조를 요청했으며 중국군은 철수했다(중국-인도 국경분쟁).

카슈미르 지방에 대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분쟁은 총리 재직기간 내내 계속되었다(잠무 카슈미르). 휴전선을 조정함으로써 잠정적으로 분쟁을 무마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실패하고 1948년 파키스탄의 무력탈취 시도도 무위로 끝났다.

인도에 남아 있던 유일한 식민지인 포르투갈고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행운이 따랐다. 1961년 12월 인도군이 고아를 점령하자 서방 여러 나라의 분노를 샀으나 역사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의 조치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인도 내의 포르투갈 식민지는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평화적으로 철수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시대착오적인 유물일 뿐이었다. 네루는 포르투갈이 영국과 프랑스의 전례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이들을 축출시킬 방도를 찾아야 했다.

설득 노력이 실패하자 네루는 일단의 비무장 인도인들로 하여금 포르투갈령 고아로 행진해 들어가도록 지시했다(1955. 8). 포르투갈인들의 발포로 약 30명의 사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네루는 6년 동안 자신의 요구를 굽히지 않으면서 서유럽 국가들에게 포르투갈의 식민지 포기를 설득해줄 것을 호소했다. 네루는 고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그와 그의 정부가 더이상 비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네루의 건강은 중국과의 분쟁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악화의 기미를 보였다.

1963년 네루는 가벼운 뇌일혈로 쓰러졌고 이듬해 1월에는 보다 심각한 뇌일혈을 일으켰다. 그는 몇 달 후 3번째의 뇌일혈로 사망했다.

평가

네루는 스스로 인도인임을 강조했지만 간디에 가까운 분위기나 힌두교적인 색채를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현대적인 정치·경제관은 인도의 젊은 지식인 계급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이끌었고 인도가 자주독립국이 된 이후에는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서구적 교육을 받고 독립 전에 수차례 유럽을 왕래했던 그는 서구적 사고방식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간디를 포함한 국민회의당 지도자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인도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는 식민지 인도 국민들에게 인도의 외교문제를 교육했을 뿐 아니라 독립 후에는 이러한 시각을 외교정책에 투영시킬 수 있었다.

간디가 인도인들에게 인도를 인식시켰다면 네루는 국민들에게 인도 외에 존재하는 다른 세력들을 인식시켰다. 세계에 내비친 독립 인도의 이미지는 곧 네루의 이미지였다.

자와할랄 네루는 17년간 총리를 지내면서 민주사회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인도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를 성취하고자 했으며 절대다수 의석을 지켜온 국민회의당을 기반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민주주의·사회주의·통일·비종교주의라고 하는 네루의 4대 정책 기조는 전생애를 통하여 체계화되어 인도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