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리팩스

핼리팩스

다른 표기 언어 Edward Frederick Lindley Wood, 1st earl of Halifax
요약 테이블
출생 1881. 4. 16, 잉글랜드 데번셔 파우더햄캐슬
사망 1959. 12. 23, 요크셔 요크 근처 개로비홀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인도 총독(1925~31), 외무장관(1938~40), 미국 주재 대사(1941~46).
Baron Irwin(1925~34), Viscount Halifax(1934~44)라고도 함.

요크셔에서 영국 국교회 가톨릭파 운동의 지도자였던 핼리팩스 자작 2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왼팔이 짧았고 손도 없었다. 이튼 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고, 1903년 옥스퍼드대학교 올솔스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뽑혔다.

1910년 1월 요크셔 리펀을 대표해 보수당 의원으로 의회에 들어갔다. 그뒤 30년은 그에게 가장 성공적인 정치활동의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한동안 프랑스에서 요크셔 용기병(龍騎兵)으로 복무했고, 1917~18년에는 징병부 차관보를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식민부 사무차관(1921~22), 교육장관(1922~24), 농업장관(1924~25)으로 일했다. 1925년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어윈 남작이 되었다. 그의 인도 총독 재임기간(1925~29)은 힌두교도 및 이슬람교도 사이의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던 시기였으나 그는 깊은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아버지처럼 그는 독실한 신자였음) 당시 인도의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자였던 간디를 이해하고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는 총독으로 있는 동안과 그 뒤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인도의 헌정(憲政) 발전을 촉진시켰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 다시 교육장관으로 재직했고(1932~35) 1934년에는 아버지의 자작작위를 이어받았다. 계속해서 국새상서(1935~37), 추밀원 의장(1937~38)으로 일했고, 네빌 체임벌린 정부에서 앤소니 이든의 후임으로 외무장관이 되었다(1938. 2. 25). 외무장관시절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시기인데, 그가 외무장관직을 수락한 것은 결국 체임벌린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에 동조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새상서로서 1937년 11월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을 방문했으며 1939년 1월에는 체임벌린과 함께 로마에 가 베니토 무솔리니를 방문하기도 했다.

핼리팩스는 외무장관이 되기 훨씬 전부터 체임벌린과 가까운 사이였다.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사임하면서 핼래팩스가 자신의 총리직을 계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제로 이 문제는 체임벌린, 핼리팩스, 처칠의 회담에서 다른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핼리팩스는 처칠의 내각에서 처음 7개월 동안 외무장관으로 있다가 1940년 12월 미국 주재 영국대사가 되었다. 미국 주재 대사로 있으면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의 대의명분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4년 핼리펙스 백작이 되었다. 1945년 3월에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영국 대표로 국제연합(UN)의 첫 회기에 참석하기도 했다. 1946년 5월 1일 대사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고, 1957년 자신의 회고록 〈충만한 나날들 Fullness of Days〉(1권)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