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트배튼

마운트배튼

다른 표기 언어 Louis Mountbatten, 1st Earl Mountbatten (of Burma)
요약 테이블
출생 1900. 6. 25, 잉글랜드 윈저 프로그모어하우스
사망 1979. 8. 27, 아일랜드 슬라이고 멀러모어 앞바다 도니골 만
국적 영국

요약 마운트배튼은 국제적인 왕실가문 출신으로 해군사령관, 인도와 파키스탄 독립을 위한 외교협상가이며 국방의 최고 지도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구축함 '켈리'와 제5구축함 소함대를 지휘했고 1941년 항공모함 사령관이 되었다. 1943~46년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미얀마를 탈환했다. 인도 부왕을 지내면서(1947. 3~8) 영국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신생독립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에 이양했고(1947. 8. 15), 인도 총독으로 재직시에는(1947. 8~1948. 6) 인도 군주들을 설득해 분리 독립한 인도·파키스탄에 각 주를 병합하도록 했다. 1956년 해군원수가 되었고, 1959~65년에는 영국 국방참모장 및 참모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국제적인 왕실가문 출신으로 해군사령관, 인도와 파키스탄 독립을 위한 외교협상가이며 국방의 최고 지도자였다. 바텐베르크 루트비히 공(뒤에 밀퍼드 헤이번 후작)과 헤센다름슈타트 공녀 빅토리아(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손녀) 사이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1913년 영국 해군에 들어가 여러 부 서에서 일했으며 1921년 웨일스 공의 부관이 되었다. 1922년 에드위나 애슐리와 결혼했다(그녀는 세인트존 구급대 책임자로 근무하다가 1960년 북보르네오에서 죽었음).

1932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다음해에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통역관 자격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구축함 '켈리'와 제5구축함 소함대를 지휘했고 1941년 항공모함 사령관이 되었다. 남들에 비해 젊은 나이에 해군장교를 맡았던 그는 1943~46년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인척 등용(그는 왕의 사촌임)이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미얀마를 탈환했다.

인도 부왕을 지내면서(1947. 3~8) 영국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신생독립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에 이양했고(1947. 8. 15), 인도 총독으로 재직시에는(1947. 8~1948. 6) 인도 군주들을 설득해 분리 독립한 인도·파키스탄에 각 주를 병합하도록 했다. 1946년 자작작위, 1947년 백작작위를 받았다.

1950~52년 해군본부위원회 제4군사위원, 1952~54년 지중해 함대 총사령관, 1955~59년에는 해군본부위원회 제1군사위원으로 진급했다. 1956년 해군원수가 되었고, 1959~65년에는 영국 국방참모장 및 참모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65년 와이트 섬 총독, 1974년에는 그곳의 주지사가 되었다. 1979년 아일랜드 공화국군 소속 과격파가 배에 장치한 폭탄이 터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