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파

가노파

[ Kanō school , 狩野派(수야파) ]

요약 15세기~19세기 막부의 후원 아래 일본 화단의 중심을 이끈 유파다. 중국 수묵화 기법에 일본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야마토에의 전통을 합친 고전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장식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
원어명 かのうは

15세기 무로마치(室町) 후기 시대부터 19세기 메이지(明治) 초기까지 약 400여 년간 일본 회화 양식의 주류를 이루었던 화가 집단이다. 가노(狩野)는 가문의 이름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일련의 화가를 배출하였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 어용화사인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1434~1530)를 시조로 하며 화단에서 영향력을 갖게 된 가노파는 공방을 중심으로 많은 주문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전국시대와 이후 모모야마 시대 무장들의 취향에 맞춘 그림을 그리며 빠르게 성장하였다. 가노파의 그림은 무사 계층은 물론 사찰이나 귀족, 부유한 상인 계층 등 다양한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가노파는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도 지속적으로 막부의 후원을 받으며 교토와 에도는 물론 그 외 도시에서도 세력을 넓혔으나, 세대를 거듭하며 가노 에이토쿠, 가노 단유 등을 제외하고는 혁신적인 화풍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19세기 막부와 함께 쇠퇴하였다.

역사

15세기 후반 무사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였던 가노 카게노부의 아들 가노 마사노부가 무로마치 막부의 어용화사(御用繪師)가 되어 초상화, 불화 등을 제작하면서 가노파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승려화가 덴쇼 슈분(天章周文)에게 영향을 받아 중국풍의 수묵화 기법을 계승하였다. 이는 당시 수묵화는 승려만 그리는 것이라는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또한 중국 전통회화의 제재를 다루면서도 표현의 명확성, 예리한 필선, 균형 잡힌 구도 등의 특징을 보였다.

마사노부의 아들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 1476~1559)는 예술성과 대중성으로 가노파의 기반을 굳힌 인물이다. 무사를 비롯해 부유한 상인과 귀족 가문을 지지 세력으로 하고, 다양한 종파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며 지지층을 넓혀 나갔다. 중국 수묵화의 힘찬 필치와 일본 전통 화풍인 야마토에의 장식적인 요소를 결합한 그의 양식은 이후 300여 년간 일본 미술계를 풍미하였다. 특히 궁전이나 사찰 등 서원건축(書院建築)의 내부 벽을 아름답게 장식한 장벽화(障壁畵)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등에도 뛰어났으며, 교토 레이운인(靈雲院)의 미닫이(襖絵)에 많은 그림을 그렸다.

에이토쿠(狩野永德, 1543~1590)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74~1600)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할아버지인 모토노부의 양식을 토대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확고히 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신뢰를 얻은 그는 거대한 성과 궁중의 어전, 대사원의 벽면에 장벽화를 주로 그렸다. 금박 바탕에 좀 더 밝은 색채와 보다 묵직한 검은 테두리 선을 사용함으로써 가노파 양식을 더욱 무게 있고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그의 화려한 작품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전쟁으로 건물들이 불타면서 작품은 그다지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모모야마 시대의 후반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가노 산라쿠(狩野山樂, 1559~1635)이다. 그는 에이토쿠의 조수에서 그의 수양아들이 되었는데 스승의 사후에도 히데요시의 후원을 받았고,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오사카 성의 최후까지 도요토미 가(家)에 충성을 바쳤다. 대(大)재난 이후 다른 가노파 화가들은 새로운 정권의 중심지인 에도로 떠났지만, 그는 교토에 남아 가노파 전통을 이어갔다.

한편, 가노파의 주류는 에도로 이동해 도쿠가와(德川) 막부(1603~1868)의 후원을 받으며 그 영향력을 이어나갔다. 에이토쿠의 세 손자인 단유(探幽), 나오노부(長信), 야스노부(安信)는 에도의 새로운 막부의 공식 어용화사 자리인 고요에시(御用絵師)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주도권을 장악하였는데, 특히 가노단유(狩野探幽, 1602~1674)는 에도 가노파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모모야마 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보다는 초기 가노파의 수묵을 중심으로 한 차분한 색조와 구도를 사용했는데, 이는 후기 가노파의 일반적 특징을 이루었다. 또한 그는 야마토에의 기법과 주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부드러운 선과 엷은 먹빛으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더해 수묵화의 일본화를 크게 진전시켰다. 야스노부는 가노파의 회화 이론을 정리한 《화도요결, 畵道要訣》(1680)을 남겼다.

가노파는 제9대까지 이어지며 에도 시대 말기까지 그 전통을 이어갔다. 에도 가노파는 다이묘나 고위 무사 계층 또는 부유한 상인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 결과 권위나 문벌주의에 집착하게 된 단유 이후의 가노파는 신선한 작품 태도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에 빠지게 되었다. 가노파는 에도 막부라는 후원자가 몰락하자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주요 화풍

가노파는 오랫동안 일본 화단에 영향력을 이어왔으며, 다양한 회화 양식, 소재, 형식을 아우르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전반적인 화풍은 중국 수묵화 기법에 일본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야마토에의 전통을 합친 것으로 고전적 경향과 서정성, 장식성을 특징으로 한다. 화조(花鳥), 산수(山水)와 같은 소재와 수묵기법 등에 있어서는 중국 송원화의 영향이 나타나지만, 대담한 붓질과 뚜렷한 윤곽선, 평면적인 구성과 같은 표현형식 및 금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장식적인 면 등에 있어서는 중국의 영향보다는 일본 전통 회화 양식의 특징이 드러난다.

가노파와 조선통신사

가노파는 오랫동안 막부를 위한 그림을 도맡아왔는데, 그 중에는 외국 사절에게 선물할 예물용 병풍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에게 매회 금으로 장식한 병풍 스무 쌍씩을 증정한 바 있다. 역시 에도성에 등정하는 통신사의 모습을 담은 두루마리 그림인 가노 단유의 《도쇼다이곤겐엔기, 東照大権現緣起》(1640)와 함께, 이 병풍들은 양국의 문화교류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