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초상화

[ 肖像畵 ]

요약 어느 특정인물의 얼굴이나 모습을 그린 그림.
마터 돌로로사

마터 돌로로사

초상화는 인물화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오늘날과 같이 사진에 의한 초상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초상조각과 함께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많이 그려졌다. 그 중에서 작자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을 자화상이라 하며, 어느 것이나 오랜 시대를 경과한 오늘에 와서는 역사나 풍속의 연구자료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초상화의 종류는 전신(全身)·흉부(胸部) 등 표현부분에 의한 구별, 단신상(單身像)·군상(群像) 등 인원수에 의한 구별이 있고, 구도적으로는 정면상·측면상 등의 구별이 있으며, 화풍으로는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과 이상화시킨 것 등이 있다.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고대에는 조각에 의한 초상이 대부분이었고 초상화가 성행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J.van 에이크, 뒤러, 홀바인 등이 명작을 남겼으며,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프란츠 할스, 반다이크 등이 나타난 바로크시대에는 초상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다시 이것은 영국의 호가스, 게인즈버러, 레이놀즈 등에게 전해졌으며, 현대에도 회화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동양의 초상화는 중국에서는 전신화(傳神畵) 등의 명칭이 있듯이 단순히 대상의 인물을 그리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 정신까지도 옮겨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서양의 초상화와는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에 가장 성행하여 《제왕도권(帝王圖卷)》 《진언오조상(眞言五祖像)》 등의 명작이 있다. 송대(宋代)에는 사실적인 경향이 더욱 정교하게 발달하여, 이 화풍은 고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려는 국초부터 도화원이 설치되어 국가적으로 화가를 양성하는 한편, 화원을 송나라에 파견하거나 때로는 송의 화가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인종(仁宗) 때의 명화가 이녕(李寧)은 송나라에 갔을 때 《예성강도(禮成江圖)》를 황제 휘종(徽宗)에게 그려 바쳐 큰 상을 받았다 함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그의 아들 광필(光弼)은 명종 때 고려의 화풍을 빛낸 유명한 화원으로 초상화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는 왕명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 두경승(杜景昇)의 초상을 그릴 때 흉상을 그리려 하였으나 두경승이 노하여 전신상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의 초상화는 대개 반신상을 위주로 하였으며, 여러 공신들이 다투어 초상을 그리게 하였으므로 초상화는 크게 발달하였다. 비단 공신뿐만이 아니라 국초부터 태조 이하의 역대 왕의 진전(眞殿:影殿)시설이 발달하여, 대부분의 사찰에는 으레 진전을 건립하였으므로 초상화는 더욱 발달하였다. 제왕 중에도 명종·충선왕·공민왕 등은 회화에 뛰어났으며,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 비(妃)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걸고 주야로 대읍(對泣)하였다 하며, 신하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린 사실이 문헌에 나타난다.

이 밖에 안치민(安置民)의 초상을 그린 이기(李琪), 이규보(李奎報)의 초상을 그린 정홍진(丁鴻進) 등도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도 고려시대를 계승하여 역대 왕의 초상을 비롯한 공신·재상의 진영이 수없이 그려졌고 나중에는 일반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초상을 그렸다. 당시 중요인물의 초상은 거의가 도화서원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태반이 흉상이었다. 지금 전해지는 초상화 중에서 일품을 소개하면, 《익제영정(益齊影幀:이제현)》과 《회헌영정(晦軒:안향)》 등은 국보로 지정되었고 《송우암진상(尤庵:송시열)》 《황지천진상(芝川:황정욱)》 등도 국보급이다. 그 밖에 김연담(金蓮潭)의 《도석인물도(道釋人物圖)》는 희대의 걸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