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욱

황정욱

[ 黃廷彧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災)를 배종(陪從)하던 중 왜군에게 붙잡혀 왜장으로부터 선조에게 항복 권유의 상소문을 쓰라고 강요받고 거부하였으나, 왕자를 죽인다는 위협에 아들 혁(赫)이 대필하였다.이 일로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황정욱 묘

황정욱 묘

출생-사망 1532 ~ 1607
본관 장수(長水)
경문(景文)
지천(芝川)
시호 문정(文貞)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지천집(芝川集)》

본관 장수(長水). 자 경문(景文). 호 지천(芝川). 시호 문정(文貞).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정언 ·응교 ·문학 ·집의(執義) 등을 역임, 1580년(선조 13) 진주(晉州)목사를 지내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종계(宗系)가 잘못 기재된 채 간행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개정(改訂)을 확인하고 돌아와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 공으로 1590년 광국(光國)공신으로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봉해지고 예조판서에 승진, 이어 병조판서로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황정욱 폰트 이미지 1)를 배종(陪從), 강원도에서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8도에 돌렸고,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會寧)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안변(安邊)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항복 권유의 상소문을 쓰라고 강요받고 이를 거부하였으나, 왕자를 죽인다는 위협에 아들 혁(赫)이 대필하였다. 이에 그는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체찰사(體察使)의 농간으로 아들의 글만이 보내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부산(釜山)에서 풀려나온 뒤 앞서의 항복권유문 때문에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1597년 석방되었으나 복관(復官)되지 못한 채 죽었다. 시문과 서예에 능했으며,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저서에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역참조항목

지천집, 장수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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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욱 신도비

황정욱 신도비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