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혁

황혁

[ 黃赫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인질로 잡혀 적장 가토 기요마사로부터 선조에게 항복권유문을 올리라는 강요에 못이겨 부친을 대신하여 썼다. 이 일로 탄핵되어 유배되었으며 이이첨을 풍자시로 빗대어 공격한 일로 미움을 받아 무고로 옥사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관되었다.
출생-사망 1551 ~ 1612
본관 장수(長水)
회지(晦之)
독석(獨石)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독석집(獨石集)》

본관 장수(長水). 자 회지(晦之). 호 독석(獨石). 1570년(선조 3) 진사를 거쳐 1580년 별시문과에 장원, 집의 ·사간을 지냈다. 1591년 우승지로 있을 때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문제로 위리안치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삭직되었다. 이듬해 이 일어나자 호군(護軍)에 기용되어 부친 정욱(廷彧)과 함께 사위인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황혁 본문 이미지 1)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 회령(會寧)에 이르러, 모반자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왜군에게 인질로 넘겨졌다. 안변(安邊)의 토굴에 감금 중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부터 선조에게 항복권유문을 올리라는 강요에 못이겨 부친을 대신하여 썼다. 이를 안 정욱이 본의가 아니며 내용이 거짓임을 밝힌 별도의 글을 올렸으나 체찰사가 가로채 전달되지 않았다.

1593년 부산에서 왕자들과 함께 송환된 후 앞서의 항복권유문으로 동인(東人)에 의해 탄핵, 이산(理山)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신천(信川)에 이배되었다. 앞서 (李爾瞻)을 풍자시로 빗대어 공격한 일로 그의 미움을 받아 1612년(광해군 4) 외손(外孫)인 진릉군(晉陵君) 태경(泰慶)을 옹립하려 한다는 무고로 옥사하였다. 1623년 (仁祖反正)으로 복관되고 좌찬성에 추증, 장천군(長川君)으로 추봉되었다. 저서에 《독석집(獨石集)》이 있다.

참조항목

,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