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금신보

양금신보

[ 梁琴新譜 ]

요약 1610년(광해군 2) 양덕수(梁德壽)가 지은 거문고악보.
『양금신보』 표지

『양금신보』 표지

목판본(木版本)의 『양금신보』는 악사 양덕수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남원(南原)에 피난 갔을 때 임실현감(任實縣監) 김두남(金斗南)의 도움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거문고곡을 모아서 편찬한 거문고악보이다. 악사(樂師) 양덕수와 임실현감 김두남 관련 기사는 『양금신보』 서문에 이렇게 전한다.

"예전 장악원(掌樂院) 악사 양덕수는 비파(琵琶)로 세상에 이름났다. 그가 특히 잘하는 것은 거문고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피하여 남원에 와서 살았는데, 사람 만나는 일을 다 끊고 오로지 거문고에만 뜻을 두었다. 집안이 조용하고 고즈넉하며 뜨락에는 매화와 대나무가 있었으며, 무릎 위에는 3척 거문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양덕수와 옛친구이다. 내가 남쪽으로 왔다가 오랜만에 만나 옛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했다. 이곳에서 만나 여러 날 머물면서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내가 비록 음률을 모르지만 일곱 줄 맑은 소리가 참으로 태고의 유음(遺音)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양 악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거문고를 잘 타고 또 문장에도 능하다. 악보를 만들어 법을 전해, 다시는 금도(琴道)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대의 책임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 악사가 '그러겠다'고 했다. 종이에 거문고를 그리고, 손가락으로 줄 누르는 법부터 먼저 설명했다. 그런 뒤에 오음(五音)의 청탁과 조습(燥濕), 완급을 그 곡조에 따라 하나하나 바르게 설명하지 않은 것이 없다. 손가락 놀림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바른 맥이 관통하니, 그의 거문고 솜씨는 노숙하다고 할 만하다. 드디어 이 내용을 책판에 새기고, 그 이름을 『양금신보』라고 하였다. 만력(萬曆 1573~1620) 경술년(庚戌年 1610, 광해군 2) 김두남이 쓰다."

이 금보에 수록된 악곡은 만대엽(慢大葉)·"북전"(北殿)·중대엽(中大葉): 평조(平調)·우조(羽調)·평조계면조(平調界面調)·우조계면조(羽調界面調)·"조음"(調音)·"감군은"(感君恩)으로 구성됐다.

『양금신보』 소재의 만대엽(통문관 제공)

『양금신보』 소재의 만대엽(통문관 제공)

『양금신보』 소재의 중대엽(통문관 제공)

『양금신보』 소재의 중대엽(통문관 제공)

이 거문고악보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고악보이다. 첫째로 현행 가곡(歌曲)의 모체인 만대엽과 중대엽을 고루 갖추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금보에 전하는 중대엽의 평조·평조계면조·우조·우조계면조, 이상 네 악조가 전하여 악조(樂調)의 역사적 변천을 규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며, 셋째로 다른 고악보처럼 필사본이 아니고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나 『금합자보』(琴合字譜 1572)처럼 목판본이기 때문에 많이 출간되어 널리 퍼져 후대에 영향을 준 고악보이기 때문이다.

이겸노(李謙魯) 소장의 원본을 통문관(通文館)에서 1959년 영인본으로 출간했다. 그 영인본에는 이혜구(李惠求)의 해제와 영문 해제가 첨가됐고, 함화진(咸和鎭)의 「한국음악소사」가 부록됐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4.1490~91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485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방송, 305쪽
  • 『樂人列傳』 허경진, 서울: 한길사, 2005년, 500~502쪽
  •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년, 4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