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막동 제사유적

죽막동 제사유적

[ 扶安 竹幕洞 祭祀遺蹟 ]

지역 부안
유적 원경(남→북)

유적 원경(남→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은 바다와 관련된 독립된 제사유적으로 4세기 중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사행위가 이루어진 곳으로, 1991년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하여 발견되어 1992년 5월 7일부터 6월 24일까지 정식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유적은 전라북도 서해안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된 최초의 제사유적으로 삼국시대 이후의 제사양상을 단계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과정을 검토할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이 유적은 서해안 상에 돌출된 해안절벽 위 평탄 면에 형성된 유적으로 삼국시대, 즉 백제시대 이후부터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제사행위가 이루어졌던 유적이다. 그러나 유적에서 노출된 유물들은 삼국시대의 것만 원래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사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뿐이고, 그 이후의 제사양상은 출토된 몇몇 유물들을 통해서 약간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본 유적에서 삼국시대의 제사 행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던 제장(祭場)은 발굴대상구역인 20×15m 범위의 평탄면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도 원래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던 수성당 뒤편의 8×9m의 범위가 제장의 중심부분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양상은 삼국시대 이후에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들은 암갈색부식토층(暗褐色腐植土層)에 부서져 섞인 채 20-30㎝의 두께로 쌓여 있었는데 포함층의 상면은 이미 교란되었고, 일부 구획은 전면(全面)이 교란되기도 하였다. 출토유물로는 90% 이상이 토기이고, 그 외에 금속유물과 모조품, 옥 제품,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 등이 있다.

토기(土器)는 공간적인 출토 양상에 따라 수성당 뒤편의 중심부토기군과 가2구토기군, 주변부토기군의 3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주변부토기군은 실제적으로 중심부토기군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의미 있게 구별된 토기군은 중심부토기군과 가2구토기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2개의 토기군은 퇴적과정, 기종의 구성, 기종내의 세부 특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중심부토기군(中心部土器群)은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각종 항아리(壺)와 그릇받침(器臺), 독(甕)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굽다리접시(高杯), 뚜껑접시(蓋杯), 손잡이잔 등 기종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가2구토기군은 제사를 지낸 후에 의도적으로 폐기한 것과 나2구 쪽에서 제사를 지내고 폐기된 것들이 후대에 가2구의 경사면 아래로 흘러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가2구토기군의 기종(器種)은 항아리(壺)와 그릇받침(器臺)이 중심이며 그 외에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병 등이 있다. 이상의 토기군은 가2구토기군이 중심부토기군의 일부로서 시기만 달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별도의 제사주체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양 토기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토기들은 후대에 뒤섞인 것으로 파악된다.

석제모조품. 길이(上右) 9.9cm

석제모조품. 길이(上右) 9.9cm

출토된 토기들은 4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까지 백제의 전성기를 망라하고 있다. 일부 항아리(壺)나 뚜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5~6세기대의 토기로 편년할 수 있으며, 특히 공헌용기(供獻用器)로서 주목되는 대형독(大形甕)은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반경의 것으로 편년된다.

금석유물로는 쇠투겁창(鐵矛), 철검(鐵劍), 쇠화살촉(鐵鏃) 등의 무기류와 말안장테(鞍橋), 말띠드리개(杏葉), 철고리(鐵環), 동고리(銅環), 혁금구(革金具), 띠고리(鉸具), 철방울(鐵鈴), 동방울(銅鈴) 등의 마구류, 거울(鏡) 등이 중심부토기군의 대형 항아리 속에 납입(納入)되어 있었다. 중심부 및 가2구토기군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원래는 항아리 속에 납입했던 것이 후대에 포함층 상면이 교란되면서 주변에 흩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중에서 비교적 개체수가 많고, 비교자료가 풍부한 말안장, 말띠드리개, 쇠투겁창으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것으로 보인다.

모조품(模造品)은 신(神)에의 공헌용(供獻用)으로 실물을 축소하여 모조한 것으로 크게 토제품과 석제품으로 나누어진다. 석제(石製) 모조품은 유공원판(有孔圓板), 선형품(蟬形品), 거울(鏡), 방울(鐸), 도끼(斧), 낫(鎌), 손칼(刀子), 굽은옥(曲玉), 판갑옷(板甲) 등 종류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실이나 다른 물질로 나무에 매달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연대는 한반도 중부 이남의 각종 유적에서 출토된 동형(同形)의 모조품으로 보아 대체로 5세기대로 편년되는데, 일부에서는 6세기 중엽 이후에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토제(土製) 모조품은 토제말(土製馬)과 인형(人形)모조품의 2종류뿐이나 유물 자체에 상징적인 의미가 많이 담겨져 있어 중요시되고 있으며, 유물중 시기가 빠른 것은 5세기까지 상한을 올려 볼 수 있다. 그 나머지는 시기와 유구를 달리하여 다양한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기타 옥류(玉類)와 육조(六朝)청자는 발굴대상구역의 일부에 걸쳐서 소량이 산포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육조청자는 확실한 기형은 알 수 없지만 각이진 귀(耳)와 유약으로 보아 육조시대(A.D. 317~581)에 제작된 중국제 청자로 보인다.

이 유적이 입지(立地)한 지리적 위치, 유물의 출토상태, 출토유물의 내용, 문헌 기록 등으로 살펴 볼 때 해안 가에 위치한 백제의 독립된 노천제사유적(露天祭祀遺蹟)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사의 대상은 어업신, 항해신, 선신(船神) 등의 해양신(海洋神)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항해신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제사의 양상은 초기에는 토기만을 사용한 노천제사였다가 5세기에 접어들면서 제사에 공헌용의 석제모조품이 등장하고 5세기 중·후반에서 늦게는 6세기 전반까지 항아리 중심의 대형 토기에 공헌용의 금속유물을 넣고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공헌용기로서 항아리와 그릇받침(器臺)은 5세기에 본격적으로 결합하여 등장하고, 6세기 이후에는 새로이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병, 장군(橫岳)과 같은 각종 기종이 공헌용기에 추가되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낸 주체는 토착세력(土着勢力)으로 판단되는데, 출토유물의 내용으로 보아 토착세력이라고 해서 평범한 지위에 속하던 사람들은 아니고 스스로 해양교섭능력(海洋交涉能力)을 가졌거나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인 지위를 가졌던 신분계층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한 신분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중국 육조청자가 출토되는데, 이것은 백제의 지배세력이 제의권을 장악하면서 지방호족에게 분여하였거나 직접 교역을 통해서 갖게 된 것으로 제사주체가 적어도 해양교섭능력을 가졌거나 상당한 사회·경제적인 지위를 가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유적에서 시기를 달리하여 출토된 유물에서 질과 내용에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면 삼국시대 내에서도 제사양상의 변화와 함께 제사주체의 사회·경제적인 변화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인정할 수 있고, 가2구토기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별도의 제사 주체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은 비록 소량이 출토되기는 하였지만 병이나 완(盌) 등을 공헌용기로 사용한 토기중심의 제사가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유적과 주변에서 기와가 출토되고 있으므로 삼국시대와 같은 노천제사를 벗어나 건조물 내에서 제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많다. 제사가 행해진 시기는 출토유물로 보아 8~9세기대의 비교적 늦은 시기로 보인다.

고려시대 역시 기와가 출토되고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처럼 노천제사를 벗어나 건조물 내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며, 제사의 주체는 사용된 제기(祭器)로 보아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지방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제사유적으로서의 점유기간은 출토유물의 연대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의 전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는 제기만 백자로 바뀌었을 뿐 제사양상은 거의 고려시대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수성당제(水聖堂祭)로 보아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항해의 안전과 풍어, 마을의 무사태평 등을 빌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세기 중반부터는 독립된 건조물로 수성당(水聖堂) 이라는 제당(祭堂)을 갖고서 제사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扶安 竹幕洞 祭祀遺蹟(國立全州博物館, 國立全州博物館 學術調査報告 第1輯,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