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변동 유적

서변동 유적

[ 大邱 西邊洞 遺蹟 ]

지역 대구
대구 서변동 유적 출토유물과 27호 집자리

대구 서변동 유적 출토유물과 27호 집자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위치한다. 택지개발구역으로 유적이 확인된 약 2만평에 대해 1998년~2000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하였다. 서변동 유적은 1964년 청동도끼〔靑銅斧〕의 출토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본 유적의 서편 산기슭에 해당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집자리〔住居址〕 48기, 고상가옥(高床家屋) 3기, 돌널무덤〔石棺墓〕 6기, 구덩유구〔竪穴遺構〕 39기, 집석유구〔集石遺構〕, 도랑유구〔溝狀遺構〕 3기, 옛 하천〔舊河道〕과 그 밖에 신석기시대의 집자리 1기, 돌무더기, 구덩이와 삼국시대의 도랑 및 논〔畓〕이 확인되었다. 금호강에서 1㎞ 정도 거슬러 올라온 동화천(桐華川) 서쪽의 산지퇴적물과 하천퇴적물이 만나면서 형성된 충적평야에 위치한다.

집자리는 평면형태에 따라 크게 원형·말각방형 계통의 송국리형〔松菊里型〕과 방형·장방형으로 구분되는데, 분포범위도 전자가 북쪽, 후자는 남쪽에 집중되어 있으며 무리 간의 거리는 약 200m이다. 송국리형집자리는 6기로서 내부에 타원형구덩이〔娥圓形竪穴〕와 바깥쪽에 기둥구멍〔柱穴〕이 나란한 것 2기와 기둥구멍만 두 개 있는 형태 4기로 구분되나 주축방향은 모두 동일하다. 원형 33호의 크기는 322×312×49㎝이고 말각방형 32호는 301×286×43㎝이다.

많은 수의 집자리가 집중된 남쪽의 방형 및 장방형 계통의 집자리 경우에도 그 주축방향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북서-남동방향과 북동-남서방향의 집자리가 혼재되어 있다. 전자는 11기, 후자는 19기인데 후자가 전자보다 빠른 것을 보여준 중복관계(16호·20호)가 있긴 하지만, 주축방향에 따라 시기차가 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크기는 장방형 1호 537×337×38㎝, 8호는 696×336×28㎝의 크기이다. 한쪽 단벽으로 150㎝의 돌출된 출입구를 가진 8호와 계단식 출입구(出入口)를 가진 27호가 있다. 특히 27호는 주변의 18호, 25호와 함께 집자리의 바닥을 처음 사용한 후 다시 5㎝ 두께로 새로 깔아 두 번 이상 사용한 경우로서, 마을의 이동과 관련된 증거로 여겨진다. 화재가 발생한 집자리는 대체로 석기유물이 양호한 상태인데 주로 석기 미완성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고상가옥은 평면 장방형인 18호 동쪽에 같은 주축방향으로 2기와 송국리형집자리군 남쪽에 동서의 주축방향으로 1기가 있다. 1호 고상건물지는 1칸×5칸의 664×177㎝ 크기인 세장방형 형태이다. 기둥 간 거리는 127∼148㎝이고 기둥구멍의 지름은 13∼18㎝이다.

돌널무덤은 장방형계 집자리 주변에서 5기가 확인되었다. 모두 당시 하천 근처에 자리잡고 있고, 돌널 내부의 길이가 최저 48㎝에서 최고 75㎝로 소형이다. 반면 송국리형집자리군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된 나머지 1기는 길이가 100㎝가 넘는다.

집석유구는 송국리형집자리군 동편의 구획된 도랑유구가 ‘ T ’자상으로 만나는 지점에 토기와 석기가 섞여 확인된다. 구획된 도랑유구는 장방형을 띠며 유적 중심을 동서방향으로 가르는 당시 하천의 북쪽에서만 존재한다. 옛하천은 동화천에서 갈라져 들어온 것과 서쪽 산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류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일부는 배후습지화(背後濕地化) 되어 있다. 내부에서 나무도끼자루를 비롯한 목기(木器)와 씨앗류를 비롯해, 토기와 석기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유물은 목기 외에 토기류는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 구멍무늬〔孔列文〕, 짧은빗금무늬〔短斜線文〕, 혹은 서로 무늬가 복합된 바리모양〔鉢形〕이 주류이며 항아리모양〔壺形〕도 일부 있다. 석기로는 삼각만입돌화살촉〔三角灣入石鏃〕,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조갯날도끼〔蛤刃石斧〕, 양날도끼〔兩刃石斧〕, 톱니날도끼〔多頭石斧〕, 돌끌〔石鑿〕, 돌낫〔石鎌〕 등 다양하다.

대구지역에서 신석기시대를 포함해 같은 평지 상에서 시기가 다른 주거군이 확인됨으로서 시기에 따른 주거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방사성탄소연대치는 집자리 1호가 2920±60 B.P.(보정연대 B.C. 1115), 27호가 2970±50 B.P.(보정연대 B.C. 1165)와 3010±60 B.P.(보정연대 B.C. 1225), 32호가 2690±40 B.P.(보정연대 B.C. 855) 25호는 2710±80 B.P.(보정연대 B.C. 1050∼760)로 측정되었다.(유병록)

참고문헌

  • 대구발견의 청동부(윤무병, 고고미술 5∼7합집, 1964년)
  • 대구 서변동 취락유적Ⅰ(영남문화재연구원,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