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그리스도교

대한민국 그리스도교

가톨릭

조선시대에 가톨릭이 알려진 것은 해마다 몇 차례씩 베이징[北京]에 다녀오던 사신들의 손을 거쳐 수입된 가톨릭 관련 서적을 통해서이다. 실학자 이수광(李光)은 1614년(광해군 6)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가톨릭을 소개했고, 뒤이어 이익(李瀷)은 안정복(安鼎福) 등과 함께 가톨릭 서적을 연구하였다.
 그 후 18세기 말엽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 등은 교리연구의 모임을 만들어 가톨릭교리를 배웠고, 1783년(정조 7) 이승훈(李承薰)은 베이징에 가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동지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렇듯 외국인 성직자의 선교 없이 평신도끼리 교회를 세운 것은 가톨릭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서울에 들어와 4,000여 명의 교인을 지도하게 되었으나, 한국 가톨릭은 이후 수차의 대박해(1801, 1839, 1846)를 겪는 동안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민생고에 시달린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에 공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한국가톨릭이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은 1886년 5월의 일이다.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나온 지 1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가톨릭은 선교의 자유를 얻은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치 운영하였고, 교육·언론을 통하여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20세기 들어 가톨릭교회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 1968년 24명의 복자(福者)가 탄생하였으며, 1969년 대주교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樞機卿)이 되었고, 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은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103위 성인(聖人)의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한국가톨릭교회는 현재 3개의 대교구(大敎區:서울·대구·광주)와 11개의 교구(인천·수원·대전·춘천·원주·안동·청주·부산·마산·전주·제주)로 나뉘어 사목활동을 펴고 있다. 1995년 가톨릭교도 수는 295만 730명으로 1985년의 186만 5397명보다 58% 늘어났다. 2015년 기준 가톨릭교도 수는 약 389만명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개신교

개신교는 1880년대 초반 조선 정부과 서구 국가들 사이의 수교조약 이후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895년 갑오개혁 이후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어 정착되었다. 한국에 관심을 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는 독일인 카를 귀츨라프였는데, 그는 1832년(순조 32) 충청도의 고대도(古代島) 등 도서에 상륙, 전도활동을 하면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의 선교사인 R.J.토머스, J.로스, J.매킨타이어 등이 입국하였다. 토머스는 1866년(고종 3) 상선인 제너럴셔먼호(號)에 편승하여 평양에 왔다가 순교하였고, 로스는 1873년 만주에 와서 한국인을 찾아 전도하며 신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매킨타이어도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인으로서 개신교의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을 남긴 사람은 이수정(李樹廷)이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일본에 가서 4년 간 그곳에 머물면서 입교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선교준비에 몰두하다가 1886년에 귀국한 후 붙잡혀 처형되었는데, 그가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은 후에 미국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가지고 입국하였다. 서상륜(徐相崙) 역시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동참했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목판에 새겨 인쇄하여 직접 보급하러 다니기까지 하였다. 1884년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에 있는 소래(松川)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한국 개신교 교회의 요람이었다.

1885년 서구 국가들과의 수교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선교사 언더우드(북장로교회), 아펜젤러(감리교회)가 입국하였고,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에서 J.H.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가, 그리고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C.J.코프와 벤슨 주교가 입국하였다. 뒤이어 1896년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리드와 J.P.캠벨 부인이 입국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캐나다 장로교회가, 그리고 1904년에는 미국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들어왔고, 1907년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듯 개국·개화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입국, 선교에 착수한 것은 주로 미국 각 교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등과 종교 활동을 병행하면서 비교적 빠르게 한국 사회에 개신교가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919년 3.1운동 당시에 개신교는 천도교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교가 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거부하여 핍박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이로 인해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쟁기 사이에 북한에 있던 많은 개신교인들이 월남하여 남한에 정착하였다. 이후 주로 도시부에 빠르게 정착한 개신교는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가장 많은 신도를 지닌 종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지속적인 분열, 일부 개신교회들의 대형교회화 추구, 부자간 교회 세습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985년 개신교도 수는 648만 9282명이었고, 1995년에는 876만 336명으로 늘었으며, 2005년에는 861만 6438명이었고, 2015년에는 967만 6천으로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