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귀츨라프

카를 귀츨라프

요약 프로이센 출신의 목사이자 의사로서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장 상선 로드 앰허스트호의 통역관으로 충남 보령시 고대도에 25일 동안 정박해 있으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조선에 나타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다.
원어명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출생-사망 1803.7.8 ~ 1851.8.9
별칭 한자명 곽실렵(郭實獵)
국적 독일
활동분야 종교, 의학, 동양학
주요저서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프로이센 출신의 선교사로서 한자 이름은 곽실렵(郭實獵)이다. 독일과 폴란드의 접경 지역인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에서 태어났다. 1821년 베를린의 야니케 선교학교(die Missioons Schule Janiches)에 입학하였고, 1823년부터 네덜란드선교회(Netherland Missionary Society)에서 공부하였다. 1826년 루터교 목사가 되었고, 1827년부터 동남아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828년부터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지원을 받아 타이(Thailand)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1830년 신구약 성서를 타이어로 번역하였다. 1831년 6월 중국 톈진[天津]을 거쳐 마카오[澳門]로 갔다. 이 때부터 183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연안을 따라 선교 여행을 했는데, 이 때의 여행기를 라는 책으로 남겼다. 특히 1832년의 두 번째의 선교 여행에서 그는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조선 서해안의 고대도에 25일 동안 머물렀는데, 이는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에 나타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는 500톤급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장(武裝) 상선으로 조선에 정식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교역할 것을 요구한 최초의 서양선이다. 이 배는 영국 동인도회사 재청(在淸) 상관(商館)의 요청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통상지를 탐사하고 통상 무역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타이완(Taiwan)과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Okinawa)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귀츨라프는 이 배에 통역관이자 선의(船醫)로 참가하였다.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년 2월 중국 광둥[廣東]을 출발하여 순조 32년인 1832년 7월 18일(음 6월 21일) 황해도 몽금포 앞바다에 나타나 그 곳 아전들과 필담을 진행한 뒤, 남하하여 7월 23일(음 6월 26일)에 충청도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島,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다. 충청 관찰사 홍희근(洪羲瑾)은 곧바로 홍주(洪州) 목사(牧使) 이민회(李敏會)를 보내 경위를 알아보게 했는데, 항해의 책임자였던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고 여러 필의 모직천과 천리경, 유리그릇, 금단추, 서적 등을 예물로 바치면서 무역 협정의 체결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싣고 온 서양천과 유리그릇, 달력 등을 조선의 금, 은, 동 및 대황(大黃) 등의 약재와 교역할 것과 자신들을 서울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영국과 거리가 멀어 교역이 어렵고, 번국(藩國)의 처지에서 중국 황제의 허락없이 사사로이 교역할 수 없는데 청(淸)의 근거할 만한 문빙(文憑)도 없이 지금까지 없었던 교역을 강제로 요청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며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8월 7일(음 7월 12일) 서산(瑞山) 간월도(看月島) 앞바다에 나타나 태안(泰安) 주사창리(舟師倉里) 주민들에게 책 등을 나눠주며 대화를 시도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7월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匣)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순조 32년 7월 21일) 그러나 로드 암허스트호는 현지 관리들의 완강한 거부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조선 정부에게 필요한 물품을 지급받고 8월 15일(음 7월 20일)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주문(奏文)과 예물을 남겨둔 채 물러났다.

귀츨라프는 1834년부터 마카오에 정착하여 주중(駐中) 영국대사의 비서이자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선교활동에 관한 기사와 책들을 썼다. 1837년에는 마카오에 표류한 일본인에게 일본어를 배워 요한복음을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1840년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 때에는 영국 정부의 통역관으로 활동했고,  난징조약(南京條約) 체결 이후에는 1851년 죽을 때까지 홍콩[香港]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선교사 양성 학교를 운영하였다. 현재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그가 남긴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 항해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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