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직

이경직

[ 李景稷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1622년에는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상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초기에 최명길을 따라 청나라 군의 부대로 찾아가 진격을 늦춤으로써 국왕을 피신시키는 등 주로 청나라 장수를 상대하는 일을 맡았다.
출생-사망 1577 ~ 1640
본관 전주(全州)
상고(尙古)
석문(石門), 효민(孝敏)
활동분야 정치

본관 전주(全州). 자 상고(尙古). 호 석문(石門). 시호 효민(孝敏). 정종의 후예로 중추부동지사 유간(惟侃)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의 형이다. 이항복(李恒福)과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1601년(선조 34)에 진사시와 생원시, 그리고 16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1606년(선조 39)에 여우길(呂祐吉)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613년(광해군 5)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에 북인들이 일으킨 계축화옥(癸丑禍獄)로 축출되었다. 그 후 복직되어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 등을 맡고, 1617년에는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북인들이 주장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을 피해 고향으로 물러갔다. 1622년에는 가도에 주둔한 명(明)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상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조반정 후 의주부윤 등을 거쳐 이괄(李适)의 난에는 전라병사로 군사를 모은 공으로 종2품에 올라 수원부사가 되었다. 경기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 후에는 호조판서 ·도승지 ·강화유수를 지냈다. 정묘호란 때 접반사(接伴使)로 활동한 것에 이어, 병자호란 때에도 초기에 최명길(崔鳴吉)을 따라 청(淸)나라 군의 부대로 찾아가 진격을 늦춤으로써 국왕을 피신시키는 등 주로 청나라 장수를 상대하는 일을 맡았다. 폐모론 반대에 보이듯이 광해군대의 북인들과 대립하였지만 이이첨(李爾瞻)의 사돈으로 개인적인 관계가 없지 않았고, 인조대에는 공신 권세가 김류(金瑬)의 지지를 받은 탓에 일반 관인들의 깊은 신임은 받지 못하였다.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참조항목

부상록,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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