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이경석

[ 李景奭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출생-사망 1595 ~ 1671
본관 전주(全州)
상보(尙輔)
백헌(白軒)
시호 문충(文忠)
국적 조선
활동분야 정치, 행정
주요작품 《백헌집》

본관 전주(全州), 자 상보(尙輔), 호 백헌(白軒), 시호 문충(文忠)이다. 정종의 열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6대손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유간(李惟侃)이다. 어려서부터 형 이경직(李景稷)에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주화파(主和波) 대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섬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여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이경직은 이일로 글을 배운것을 한탄하였다.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반청정책(북벌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모든 일은 영의정의 책임이라고 자임하고 나섰다. 효종이 청나라 조사관에게 간청하여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68년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등 존명사대의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난국을 극복한 탁월한 재상이었으며 일생동안 검소하고 소박한 청백리의 삶을 살았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