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

[ Samjeondobi Monument, Seoul , 서울 三田渡碑 ]

요약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전도비

삼전도비

지정종목 사적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시대 조선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크기 전체 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새겼고, 다른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과 몽골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비석의 모양은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물의 특징적인 것으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년(고종 32)에 매몰하였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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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세운 전승비 사적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 비명은 여이징이 썼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