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명배금정책

친명배금정책

[ 親明排金政策 ]

요약 조선 인조 때 명나라를 중시하고 후금을 멸시한 정책.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보내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비록 참담한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은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느끼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일본의 침략에 신경을 쏟고 있을 때 만주지역에서는 새로운 금나라가 건국되었다. 이후 금나라는 세력이 팽창되면서 명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금나라는 명나라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광해군은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하면서 어느 쪽의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광해군의 태도를 조선의 유학자들은 명과의 재조지은을 버린 행위라고 비판하였고, 이것은 광해군이 쫓겨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후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반정세력들에 의해 금나라 이후 건국된 후금(後金)을 배척하고 재조지은을 입은 명나라와는 친밀하게 지내는 형태의 외교기조를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명나라와 친밀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이라 한다. 그러나 표면상 유학자들의 정서가 친명배금을 표방했을 뿐 인조대의 외교정책이 구체적으로 배금정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기조는 금나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는 금으로서는 배후에 있는 조선을 확고하게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정묘호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후금의 요구와 약탈에 시달리던 조선 내부에서 배척 감정이 점점 심해지자 그들은 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 조선에 재침입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카테고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