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읍

식읍

[ 食邑 ]

요약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왕족 ·공신(功臣) ·봉작자 등에게 준 일정한 지역.

식봉(食封)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진(秦) ·한(漢)시대부터 봉작(封爵)에 따라 채읍(采邑)을 주어 채읍 내의 조세(租稅)를 수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채읍에 대한 지배권은 거의 없었으며, 당(唐)나라까지 이러한 형태의 식읍제도가 이어졌다. BC 200년 이후부터는 봉작이 명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식읍도 형식상으로만 주었다. 송(宋)나라에서는 요직을 맡은 관리에게 실봉(實封)으로서의 식읍을 주었고, 원(元)나라에서는 대식읍을 영유하는 왕후(王侯)도 나타나게 되었지만, 역시 지배권은 인정되지 않았고, 봉작과 같이 상속되었다.

한국의 식읍제도는 자세하지 않으나, 532년(신라 법흥왕 19) 금관국(金官國:駕洛)의 김구해(金仇亥)가 신라에 내항(來降)하자 이를 금관군(金官郡)으로 격하하고 예민(隸民)과 함께 식읍으로 주었다. 이와 같이 신라는 내항자 ·전공자(戰功者) ·귀족에게 식읍을 주었고, 이들은 구지배지(舊支配地)를 식읍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으며, 이 경제력을 배경으로 통일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말기에는 반국가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의 식읍은 수조권(收租權)뿐만 아니라 채읍의 지배권까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917년(경명왕 1)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에 많은 국토를 잠식당한 신라의 경명왕은 즉위하자마자 8왕자에게 남은 땅을 식읍으로 나누어 주었다. 사벌대군(沙伐大君)으로 책봉된 다섯번째 왕자 박언창(朴彦昌)이 사벌주(沙伐州)에 사벌국을 세워 이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였으나, 12년 만인 929년(경순왕 3) 멸망하였다. 신라에서의 식읍에 대한 조세 수취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구려에서는 일반 자유민에 대한 조(租)는 1등호(戶) 1석(石), 2등호 7두(斗), 3등호 5두를 거뒀으며, 세(稅)는 포(布) 5필, 곡(穀) 5석이었다. 백제의 경우 수량은 알 수 없으나 부세(賦稅)로 포 ·견(絹) ·사마(絲痲) 등을 받았다.

고려에서는 935년(태조 18) 내항하여 온 후백제의 견훤을 백관(百官) 위의 지위로 예우하고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같은해 내속(來屬)한 신라의 김부(金傅:경순왕)를 태자(太子)의 상위인 정승으로 예우하고 경주(慶州)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초기에는 왕실의 기본 재정으로 동궁(東宮) 식읍이 있었다. 고려는 왕자 ·척신(戚臣) ·종실 ·고위 관원 중 국가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식읍을 주었는데, 문종 때는 훈작제도(勳爵制度)와 함께 식읍제를 정비하여 공후국공(公侯國公:정2품)에는 식읍 3,000호, 군공(郡公:종2품)에는 2,000호, 현후(縣侯)에는 1,000호, 현백(縣伯)에는 700호, 개국자(開國子)에는 500호, 현남(縣男)에는 300호를 주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의 형식상의 것이고, 사령장의 ‘식읍 몇 호(戶)’에 병기(倂記)되어 있는 ‘식실봉(食實封) 몇 호’가 실질적인 것으로, 여기서 조세와 공부(貢賦)를 받아 취득하였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식읍을 받은 것은 왕자를 비롯한 왕족이었으며, 한 왕대에 10여 명 내지 수십 명에 이르는 왕족이 식읍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봉건귀족(封建貴族)으로, 공훈전(功勳田) 또는 사패전(賜牌田) 등의 명목으로 따로 토지를 받아 대토지소유자가 되었다. 고위 관원에게 준 식읍의 예로는 1206년(희종 2) 무신정권을 세운 최충헌(崔忠獻)을 진강후(晉康侯)에 책봉하고,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수여하여 진강군(晉康郡,晉陽郡 :진주 일대)을 식읍으로 정하였다. 이 식읍제도는 조선에는 계승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