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견훤

[ 甄萱 ]

요약 후삼국시대에 후백제를 세운 왕(재위 900~935).
숭위전

숭위전

출생-사망 867 ~ 936
재위기간 900-935
시대 후삼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본래의 성은 '이(李)'이지만, 나중에 성을 '견(甄)'으로 바꿨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이며,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는 본래 농민이었으나 뒤에 장군이 되었다. 생모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에는 견훤의 어머니가 일을 하느라 어린 견훤을 강보에 싸서 숲에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어린 시절부터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했다. 그리고 성장하여 종군을 하게 되었을 때 서남해(西南海) 지방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때인 888년 세금을 독촉하는 중앙정부에 맞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견훤은 신라의 서남부 지역에서 세력을 모아서 892년(진성여왕 6)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를 신라서면 도독(新羅西面都督)이자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으로 칭했다. 그리고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서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 남조의 국가들에도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901년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신라 정복에 나섰다. 그 뒤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그 뒤를 이은 왕건(王建)의 고려와 후삼국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920년 견훤은 군대를 보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을 압박했다. 그러자 신라는 왕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924년 견훤은 대야성과 문소성(聞韶城)에 주둔하던 병력을 동원해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했고, 이듬해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물성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왕건이 직접 원군을 이끌고 오자,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고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뒤 견훤은 거창(居昌) 등 신라의 20여 개의 성을 공격해서 점령했다.

926년 인질로 보낸 진호(眞虎)가 죽자 후백제와 고려의 화친을 파기되었다. 927년 견훤은 근품성(近嵒城)을 점령하고 고울부(高鬱府)를 공격해 신라의 도성인 금성(金城)을 압박했다. 신라는 왕건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견훤은 금성을 점령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죽였다. 그리고 경순왕(敬順王)을 왕위에 앉힌 뒤 왕족과 귀족 등을 포로로 붙잡고 철군하였다. 왕건은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해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의 장수를 잃은 채 간신히 탈출했다. 견훤은 고려군을 계속 몰아쳐 대목군(大木郡)을 점령했다. 928년에는 강주(康州)를 기습해 그곳을 지키던 장군 유문(有文)의 항복을 받았고, 부곡성(缶谷城)도 함락시켰다. 929년에는 홍술(洪術)을 죽이고 의성부(義城府)를 함락시켰으나, 고창군(古昌郡)의 증산(甁山)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에 크게 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8,000여 명 내외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안동과 청송 일대의 30여 고을, 명주(溟州)부터 흥례부(興禮府)에 이르는 지역의 성(城) 100여개 이상이 고려에 귀부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견훤은 군대를 수습해 순주성(順州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932년에는 일길찬(一吉湌) 상귀(相貴)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본거지인 예성강 일대를 공격하게 해서, 3일 동안 염주(鹽州)·백주(白州)·정주(貞州) 일대의 배를 파괴하고 말을 탈취했다.

이처럼 견훤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고려를 압박했으나, 934년에는 왕건이 운주(運州)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에 나섰다가 역습을 받는 바람에 크게 패했다. 이 패배 이후에 웅진 이북의 30여 성과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등의 장수들이 고려에 항복했다. 그리고 견훤이 늙으면서 후계 문제를 놓고 내분이 생겨 후백제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견훤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총애해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찬(伊湌) 능환(能奐)과 파진찬(波珍湌) 신덕(新德)·영순(英順) 등은 맏아들인 신검(神劒)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래서 강주(康州)와 무주(武州)의 도독으로 있던, 견훤의 다른 아들들인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과 모의하여 935년 음력 3월에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었다. 그리고 금강을 죽이고, 신검을 왕으로 세웠다.

금산사에 3달 동안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막내아들인 능예(能乂) 등과 함께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으로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 의사를 전했다. 왕건은 검필(黔弼)과 만세(萬歲) 등의 장수를 보내 견훤을 고려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를 ‘상부(尙父)’라고 부르고, 남궁(南宮)에 머무르게 했으며,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었다.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자 그의 사위인 영규(英規)도 이듬해 투항 의사를 밝혀왔다. 그러자 왕건은 936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천안부(天安府)로 가서 후백제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다. 견훤도 왕건과 함께 출정하였다. 마침내 구미시의 일리천(一利川)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려는 후백제의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었고, 신검·양검·용검 형제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견훤은 후백제가 멸망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황산(黃山)의 절에서 등창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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