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사회경제

원의 사회경제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異民族)문화를 수용하고 있던 다민족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거기에 지배민족인 몽골인 사회는 근각(根脚:혈통)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서 이를 규제하려 하였다. 먼저 몽골인을 국족(國族), 서방계의 투르크 ·이란 ·유럽인을 색목인(色目人), 금국(金國)의 유민 즉 화북의 백성을 한인(漢人),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南人)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이 가운데 원나라의 황실을 비롯해서 유목영주층 ·몽골귀족층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북방의 초원에 광대한 유목지를 소유하고 케린코라 불린 다수의 가내노예를 사역하였으며, 중국의 내지(內地)에도 여러 곳에 식읍(食邑)을 급여하여, 이른바 ‘투하(投下)’된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층이었다.

다음 계층은 몽골제국 또는 원나라 정권의 성립에 훈공을 세운 색목인 및 한인(漢人)으로, 여기에는 대개 (軍閥) 출신자가 많았다. 그 다음의 중간층은 하급의 이원(吏員) 출신자나 무인(武人) 출신자로, 폭넓게 원나라정권을 받쳐주었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최하위층은 이들 특권적 신분에서 완전히 배제된 한인(漢人) ·남인(南人)의 대중들이었다.

원조(元朝)에서는 호적상 이들 신분층을 계관호(係官戶:帝國의 臣民)와 투하호(投下戶:領主 ·귀족에게 私屬되어 있던 백성)로 크게 나누었다. 계관호는 민(民) ·군(軍) ·장(匠)외에 참(站:驛傳) ·조(竈:製鹽) ·차(茶:栽培 ·摘茶) ·유(儒) ·승(僧) ·도(道) ·회회(回回:이슬람) ·야리가온(그리스도교) ·음양(陰陽) ·의(醫) ·복(卜) 및 공과부담(公課負擔) 종교와 전문업종에 따라 세부적으로 구분하였다.

이 가운데 민호(民戶) 즉 농민 가족의 부담이 가장 무거워, 화북에서는 세량(稅糧:田租)과 과차(科差:銀 또는 紙幣 및 生系稅와 그 밖의 夫役)를, 강남에서는 하세(夏稅:華北의 科差에 해당)와 추량(秋糧:華北의 稅糧)이 부과되었다. 군호(軍戶)에는 군역(軍役)을, 장호(匠戶:수공업 기술자의 戶)에는 장역(匠役)을, 참호(站戶)에는 역전(驛傳)을 과차(科差) 대신으로 부과하였고, 세량에 있어서도 민호보다 적었다.

또한 유 ·승 ·도나 그 밖의 종교인은 특히 우대하여 과차면제의 특혜를 베풀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良民層:평민층)에 속하였으나 이 아래에 구구(驅口)라 불리던 노예층이 있었다. 이들은 오랜 전란의 결과로 생긴 계층으로, 이들 노예층의 증대는 양민층의 호구를 감소시키는 것이어서 정부당국은 공과부담자를 증가시켜야 할 필요성에서도 이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이상 각종 민족사회를 호구상으로 살펴보면 몽골 ·색목인층 등 최상층은 40∼50만 호(200∼300만 명)에 불과하였던 데 비해 한인(漢人)은 200만 호(1,000만 명), 남인은 이보다 많은 1,200만 호(6,000만 명)에 이르러, 지배민족층은 피지배민족사회로부터 큰 압박감을 받았기 때문에 원나라 조정은 한인 ·남인의 사회적 진출을 억제하고자 이 네 개의 종족사회에 법제적인 차별을 두었다. 즉 임관(任官)이나 형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몽골인을 제1계층으로 해서 우대하였고, 그 다음 색목인 ·한인 ·남인의 순으로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또한 원나라에서는 한인 ·남인에게는 무기의 휴대 ·소유도 엄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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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경제정책은 중국 역대왕조들의 중농적(重農的) 시책과는 달리 현저한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경제시책을 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쿠빌라이칸은 유자(儒者)의 견해를 존중해서 권농정책(勸農政策)을 취하여 관찬(官撰)의 농업기술서를 민간에 배포해서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뒤 정부당국자들은 재정정책의 중심을 국내의 상업이나 국제무역의 진흥, 특히 소금 ·차(茶) ·술 등의 전매익금(專賣益金)의 증대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상업이 성행하였던 간선(幹線)은 수도인 대도(大都)와 강남의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선(大運河線)으로 그 선의 유역에는 많은 도시가 번영하였고, 수공업품의 생산이나 판매로 번창하였다. 북서쪽은 육상으로 대도에서 몽골초원을 거쳐 [天山南路] 또는 로 이어졌고, 남동(南東)은 항저우에서 해로(海路), 경원(慶元:寧波) ·천주(泉州:福建) ·광둥[廣東]으로 통하였고, 다시 남해항로로 이어졌다. 이처럼 원나라의 국내 상업로는 당시의 대륙을 한 고리로 하는 국제무역선에 직접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유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원나라는 교초(交鈔)라 불리던 정부 신용의 지폐를 발행하였다. 이에는 중통초(中統鈔)와 지원초(至元鈔)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여러 액면표시의 지폐가 다량으로 발행되어 중국전역에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해외무역에서는 모두 은전(銀錢)에 의한 거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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