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헌력

시헌력

[ 時憲曆 ]

요약 조선시대 1653년 이후 1910년까지 한국에서 쓰인 역법으로 서양의 수치와 계산방법이 채택된 숭정역법을 교정하여 사용하였다. 시헌력은 평기법을 폐지하고 처음으로 정기법을 쓴 점이 특징이다.

중국에서는 1629년부터 14년간 숭정역법(崇禎曆法)이 쓰였는데, 이 역법은 서양의 수치와 계산방법이 채택된 것이다. 시헌력은 숭정역법을 교정하여 1645년부터 채택되었다. 한국에는 숭정역법이 도입되지 않고 대통력(大統曆)에 이어 곧바로 시헌역법이 채택되었다. 시헌력은 평기법(平氣法)을 폐지하고 처음으로 정기법(定氣法)을 쓴 점이 특징이다.

여기서 평기는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24기(氣)를 균등하게 취한 것이고, 정기는 황도를 15°씩 분할하여 태양의 각 분점을 통과할 때를 취한 것이다. 한 기로부터 다음 기까지의 기간은 평기에서는 약 15.218일이지만, 정기에서는 14.72~15.73일 사이이다. 따라서 중기(中氣)에서 다음 중기까지의 기간이 29.48일이 되는 수도 있어 1역월(曆月) 동안에 2개의 중기를 포함하는 경우가 생긴다.

조선시대의 초기에는 고려 공민왕 때 명나라에서 가져온 대통역법이 사용되었으며 세종 때는 이것을 실정에 맞도록 개편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엮은 일이 있다. 그 후 중국에는 가톨릭의 전래와 함께 서양문명이 들어와 역법에서도 독일의 선교사 샬 폰 벨(중국 이름 湯若望)이 서양역법을 기초로 편찬한 시헌력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이 서양문물에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인조(仁祖) 때부터로, 1631년(인조 9) 정두원(鄭斗源)이 연경(燕京:현 北京)에서 돌아올 때, 이탈리아의 신부 J.로도리게스(중국이름 陸若望)로부터 《치력연기(治曆緣起)》 1권과 《천문략(天文略)》 1권, 자명종(自鳴鐘)·천리경(千里鏡)·일구관(日晷觀)을 받아왔다.

1644년(인조 22)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김육(金堉)이 시헌력을 채용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직접 청나라에 가서 아담샬에게서 시헌역법에 관한 서적을 구하여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후, 김상범(金尙范)에게 시헌력을 연구하도록 했으며, 1651년(효종 2) 김상범은 청의 흠천감(欽天監)에 교섭하여 시헌역법을 배워왔다.

그러나 오성(五星)의 계산법을 완전히 해득하지 못하였으므로, 1655년(효종 6)에 또다시 연경으로 갔으나 불행히도 도중에서 사망하여 좌절되었다. 하지만 시헌역법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내용이 밝혀졌다. 1708년(숙종 34) 처음으로 시헌력 오성법(五星法)을 썼는데, 이것은 앞서 관상감추산관(觀象監推算官) 허원(許遠)이 청나라 연경에 들어가 시헌법칠정표를 흠천감에서 얻어와 썼다.

1725년(영조 1)에는 《신수시헌칠정법(新修時憲七政法)》으로 고쳐 썼고, 1782년(정조 6)에는 서운관에서 천세력을 작성하고, 1894년(고종 31)에 이르러 서양의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고 시헌력을 참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