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파르코스

히파르코스

다른 표기 언어 Hipparchos
요약 테이블
출생 ?, 비티니아 니케아
사망 BC 127 이후
국적 그리스

요약 그리스의 천문학자·수학자.
(영). Hipparchus.

목차

접기
  1. 항성 관측
  2. 달·태양에 대한 업적
  3. 수학에 대한 공헌
  4. 지리학에 대한 업적

세차운동(歲差運動)을 발견했으며 1년의 길이를 6½분의 오차 내로 계산했다.

또한 처음으로 별의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에 3각법의 공식을 만들었다.

히파르코스는 그가 오랜 시간을 보냈던 비티니아의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관측을 수행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연구를 수행한 것은 BC 127년이라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J.-B.-J. 들랑브르(1749~1822)는 큰개자리의 에타 별을 관측한 히파르코스의 기록 중 일부가 바로 그해에 수행한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히파르코스에 대한 오늘날 지식의 대부분은 아마세이아의 스트라보(21경 활동)의 저술과 프톨레마이오스(127~151 활동)가 쓴 위대한 천문학개론서인 〈알마게스트 Almagest〉에 수록된 것에서 얻은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종종 히파르코스를 언급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를 높이 평가했음이 분명하다.

그 두 사람의 연구업적이 거의 300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과학발전은 느리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는 뛰어난 동시대의 사람에게 대하듯이 존경심을 가지고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때문에 둘 중 누구에게 연구업적이 돌아가야 하는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히파르코스는 모든 저서에서 명확한 생각을 보여주었으며, 불필요하게 복잡한 가설은 좋아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모든 점성술적인 교육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르키메데스에 따르면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서 제안되었고 히파르코스와 동시대 인물인 바빌로니아의 셀레우코스에 의해 재조명된 태양중심설도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지어 상기해볼 것은 당시에는 지구가 운동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으며, 전체적인 여론의 분위기가 아리스타르코스의 견해에 한번도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움직이는 이심원(異心圓) 체계와 주전원(周轉圓)·주원(周圓) 체계는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관측되는 대부분의 불규칙성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이러한 2가지 체계는 모든 천체가 규칙적인 원형의 운동을 하거나, 최소한 원을 그리면서 규칙적으로 운동한다는 체계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움직이는 이심원 체계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천체의 궤도로 생각되는 것의 중심 그 자체도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것이다. 다른 체계에서는 주전원이 주원이라고 불리는 큰 원형궤도에 놓여 있는 조그마한 원이었다. 주전원·주원 체계는 움직이는 이심원 체계와 더불어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기 지구중심우주론에서 등장한다. 이때문에 이러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은 서유럽의 과학에 전해졌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자신도 인정했던 것처럼 히파르코스의 생각이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15세기가 되어서 매우 오랜 기간의 관측결과 비로소 지구중심설이 너무 복잡해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히파르코스가 사용했던 기구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비록 프롤레마이오스에 따르면 히파르코스가 각도를 측정하기 위해 진보한 형태의 경위의를 발명했다고는 하지만, 히파르코스가 이용한 관측기기는 그당시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기기였던 것 같다.

히파르코스(Hipparchos)의 관측
히파르코스(Hipparchos)의 관측

항성 관측

히파르코스는 세차운동, 즉 황도와 천구적도(지구적도를 확장했을 때 천구에 생기는 거대한 원)의 교차점이 움직이기 때문에 측정한 별의 위치가 변하는 현상을 발견하고 〈세차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 것 같다(→ 분점세차). 이 현상을 '세차'(precession)라는 말로 나타냈는데 이 용어는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 놀라운 발견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고된 관측작업의 결과였다. 히파르코스는 별의 위치를 관측한 뒤 그 결과를 150년 전의 알렉산드리아의 티모카리스의 관측결과와 비교했고, 그 이전의 바빌로니아 시대에 관측된 것과도 비교했다. 그는 같은 천체의 지름이 서로 다르며, 그 차이가 관측오차 때문에 생기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1년에 45~46″씩 움직이는 세차운동을 주장했다. 이것은 현재 받아들여지는 50.26″이라는 값에 매우 근접한 것이고 프톨레마이오스가 얻은 36″보다 훨씬 정확한 것이다.

세차운동의 발견으로 히파르코스는 태양년(태양의 위치가 한 분점에서 같은 분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항성년(태양의 위치가 한 별에서 같은 별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더욱 정확하게 구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구한 태양년은 매우 정확해서 단지 6½의 오차가 있었다(→ 항성주기).

고대에 흔히 그랬던 것처럼 별의 위치를 적경과 적위에 따라서 관측한 히파르코스는 그 자료를 목록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최초로 완성된 별의 목록이었다(→ 항성목록). 그는 이전의 어떤 관측자보다도 정확하게 별의 위치를 측정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와 심지어는 에드먼드 핼리도 그의 자료를 사용했다. 몇몇 히파르코스의 동시대인들은 별목록을 작성하는 것을 불경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견디어냈다. BC 134년 그는 '새로운 별'을 관측하자 더욱 자극받았다.

그는 이와 같은 현상이 별의 수가 결국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별목록을 작성하기로 결심했으며, 어떠한 비난도 그의 원래의 목적을 변하게 하지 못했다. BC 129년에 완성된 히파르코스의 목록은 약 850개의 별(흔히 언급되는 1,080개가 아님)이 수록되어 있으며, 별의 겉보기 등급을 오늘날에 쓰이는 것과 비슷한 6등급 체계로 분류했다. 그당시로서 이 목록은 기념비적인 업적이었다.

달·태양에 대한 업적

그는 태양과 달에 관해 연구하면서 자신의 관측결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측결과도 이용했다. 그는 움직이는 이심원에 바탕을 둔 체계와 주전원과 주원에 바탕을 둔 체계가 태양과 달에 대해 적용하면 똑같은 결과를 내며, 또한 행성에 대해서도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2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태양의 위치를 1′ 이내로 정확하게 구할 수 있었으며, 그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태양이 황도에 대해 경사진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특이운동에 대한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황도의 경사를 다시 측정해서, 오늘날 알려진 수치와의 차이가 5′ 이내인 정확한 값을 얻었다.

달은 지구와 태양 모두로부터 섭동을 받기 때문에 태양보다 더욱 복잡한 운동을 한다. 그러므로 고려해야 되는 불규칙한 현상이 더욱 많다. 히파르코스는 지금은 달의 궤도가 타원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알려진 달의 불균일한 운동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했다. 그는 주전원과 주원 체계를 사용했지만, 주원이 황도면에 대해 5° 기울어져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보름달과 초승달일 때의 달의 운동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였지만 상현이나 하현일 때에는 오차가 너무 커져서 실망했다. 또한 그는 달의 운동에 또다른 불균일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어떤 방법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그의 뒤를 이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둔다고 솔직히 말했다. 또한 히파르코스는 태양과 달의 상대적인 크기와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대한 문제의 해결도 시도했다. 물론 이 두 천체의 겉보기 지름이 똑같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많은 천문학자들이 이 두 천체의 크기와 거리의 비율을 측정하려고 시도했다.

에우독소스는 9 대 1이라는 값을, 아르키메데스의 아버지인 피디아스는 12 대 1을, 아르키메데스는 30 대 1을 얻은 반면 아리스타르코스는 20 대 1이 정확하다고 믿었다. 현재 알려진 값은 대략 393 대 1이다. 히파르코스가 사용한 방법은 달에 비치는 지구의 그림자의 폭을 측정해서(월식이 일어나는 동안 달 표면을 가로지르는 지구 그림자의 이동시간을 측정하면 얻을 수 있음) 알아내는 방법인데 이것은 아리스타르코스가 쓴 방법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실제로 달의 시차(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천체를 관찰했을 때의 전체의 겉보기 위치변화), 즉 달의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태양의 시차는 너무 작아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으며, 더욱이 얻을 수 있었던 달의 거리에 대한 정밀도도 좋지 못했다.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히파르코스는 일식에 대한 관측과 계산이 일치하는 태양시차의 한계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또한 태양시차와 달시차 사이의 차이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태양의 시차는 무시될 정도로 작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적어도 태양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것은 알았다. 히파르코스는 만족스러운 행성이론을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불충분한 증거로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 과학자였다. 히파르코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해·달·행성에 대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순서를 채택했다. 즉, 지구를 중심에 두고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이다.

수학에 대한 공헌

히파르코스의 천문학적 업적은 수학의 일부 분야를 발달시켰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삼각법의 초기 공식을 만들었으며 현의 계산표를 만들었다. 즉 단위원과 원의 중심에 주어진 각에 대응하는 두 점 사이를 연결하는 선의 길이, 예를 들면 각 α의 현=2 sin(α/2)로 표현되는 현의 길이를 구하는 표를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구면삼각형을 계산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면기하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법칙'으로 알려진 정리도 원래는 히파르코스의 것인데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모방한 것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수학자인 라자르 카르노는 평면삼각법 전체를 이 공식들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리학에 대한 업적

히파르코스는 에라토스테네스(BC 276~194)의 지리학 연구업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스스로 이 분야에서 몇 가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요한 공헌은 지구 표면에 있는 위치를 결정하는데 엄밀한 수학적 원리를 적용했고 오늘날과 같이 경도위도를 이용하여 위치를 나타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 방법을 구면삼각법에 대한 연구에서 착안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북쪽으로 감에 따라 나타나는 낮의 길이의 차이를 측정하는 통상적인 바빌로니아 방법을 쓰는 대신 특정한 장소에서 낮이 가장 긴 날과 가장 짧은 날의 비를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해서 위도를 측정하려고 했다.

또한 당시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세계를 기후지대에 따라서 나누었으며, 각 지역에서 일식이 시작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을 관측하면 경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 대담한 계획은 지구 표면의 좁은 영역에서는 이론적으로 만족스럽지만 그 시대에서는 실질적인 제안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