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노

카르노

다른 표기 언어 Lazare(-Nicolas-Marguerite) Carnot 동의어 라자르 카르노, 라자르 니콜라 마거리트 카르노 백작, Lazare Nicolas Marguerite Count Carnot
요약 테이블
출생 1753. 5. 13, 프랑스 부르고뉴 놀레
사망 1823. 8. 2, 프로이센 작센 마크데부르크
국적 프랑스

요약 카르노는 프랑스 혁명기의 여러 정부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으며, 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 및 프랑스 혁명기 헌법으로 설립된 총재정부(1793~97년)에서 주도적인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혁명군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789년 대위로 복무 중일 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791년 입법의회 의원, 1792년에는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루이16세의 처형에 관한 투표에서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급진파임을 드러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 위원이었으나 1794년 5월초 로베스피에르 및 생 쥐스트와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근본적 보수주의자인 그는 로베스피에르와 그 무리들이 지향했던 평등주의적 사회정책에 공감하지 않았다. 1795~99년에 5인 총재 행정부인 총재정부의 일원으로 활동되었으나 1815년 7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교육과 훈련
  3. 정치적 부상과 몰락
라자르 니콜라 마거릿 카르노(Lazare Nicolas-Marguerite Carnot)
라자르 니콜라 마거릿 카르노(Lazare Nicolas-Marguerite Carnot)

개요

프랑스 혁명기의 여러 정부에서 계속해서 관직을 맡았으며 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 및 총재정부(1793~97)에서 주도적인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혁명군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교육과 훈련

변호사의 아들인 그는 콜레주 도툉에서 공부했고 이어서 역시 오툉에 있는 조그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69~71년 파리에 있는 포병 및 공병 예비학교를 마친 뒤 1773년 1월 중위계급으로 메지에르공병학교를 졸업했다. 그때부터 그는 수비대 장교로 복무하기 시작해 이곳 저곳으로 복무지를 옮기면서도 가는 곳마다 문학 서클에서 활동했다. 1780년에는 유명한 문학단체 회원으로 가입했고 1784년 프랑스 공병대원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에게 바치는 송가로 디종 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졌다. 1787년에는 아라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는데, 당시 이 아카데미의 총장은 나중에 혁명의 지도적 인물이 된 로베스피에르였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카르노는 1784년에 진급했던 대위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1791년 파드칼레 대표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외교위원회와 공공교육위원회 위원으로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군중들이 파리의 튈르리 궁전을 습격한 바로 다음날인 1792년 8월 11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고하는 임무를 띠고 라인 주둔 연대로 파견되었다. 1792년 9월 그는 파드칼레 대표 국민공회(왕정이 무너진 뒤에 생긴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달말 다른 2명의 대표와 함께 스페인의 공격 위험에 대비해 방어를 조직할 임무를 띠고 베욘에 파견되었다.

그는 1793년 1월 초순까지 파리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의 재판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는 참가하지 못했으나 결정적인 투표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국민들에게 호소하자는 의견에는 반대표를, 왕의 처형에는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급진파인 자코뱅당 편임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그는 기질로나 성향으로나 당 중앙부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위원회 위원으로서 보안위원회로 발령받았다. 보안위원회는 혁명 프랑스의 행정부로서 기능했던 공안위원회의 전신이었다.

이 직위에 있으면서 국민공회에 여러 가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특히 그가 1793년 3월 9일 올린 보고서에 따라 징병을 촉진하기 위해 82명의 대의원들이 각 주(département)로 파견되어 30만 명의 군인이 모집되었다. 그는 노르 주와 파드칼레 주에 파견되었고 3월말에는 북부 군대로 파견되었다. 1793년 8월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사람을 다루는 기술뿐 아니라 군사작전에 완전히 통달하게 되었다.

그는 군대를 개편하고 규율을 다시 잡았으며 머스킷 총을 손에 들고 퓌른을 공격하고 함락시키는 데 참전했다.

정치적 부상과 몰락

1793년 8월 14일 국민공회는 카르노를 공안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얼마 뒤 그는 다시 북부 군대를 향해 떠났는데 당시 적군은 모뵈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1793년 10월 16일 와티니 전투의 승리와 모뵈주 포위 해제로 완수되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장군들의 곁에서 공격을 이끌었고 그들과 나란히 탈환한 모뵈주로 입성했다. 그달 말에는 다시 공안위원회 활동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그는 계속해서 공안위원회의 방대한 과제에 몰두했고 일반 정책을 완전히 등한시하지 않으면서도 군사작전 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애초부터 대열을 지어 싸우는 구식 전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대신 결정적인 지점에 군대를 대량 투입하는 공격작전을 내세웠다. 결국 이 견해가 전체위원회에서 채택되었고, 그는 전체 공안위원회에서 논의되던 군사원정계획을 펼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로베스피에르와 로베스피에르의 주요 보좌인이었던 생 쥐스트 역시 특별히 전략에 관여하고 있었다.

1794년 5월초 공안위원회 내에서 카르노와 로베스피에르 및 생 쥐스트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이들은 모두 똑같은 권위주의자였고 서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였던 카르노는 로베스피에르와 그 무리들이 지향했던 평등주의적 사회정책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가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하고 공포정치의 종말을 알린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 7. 27)의 쿠데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에는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노의 역할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로도 몇 달 간 계속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나, 곧 공안위원회에서 활약했던 위원들을 누구든 상관없이 모두 공격하려는 테르미도르 반동 세력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그리하여 1795년 3월에 그는 이전의 동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생각에서, 위원회의 각 위원들은 단지 각자가 맡은 직무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으며 비난받을 만한 법령에 서명한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난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1795년 5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의원이 전 공안위원회의 모든 위원들을 체포할 것을 다그치고 카르노를 지명했으나 또다른 한 의원이 "카르노는 승리를 조직했다"라고 외쳐준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카르노는 1795~99년에 프랑스를 통치했던 5인 총재 행정부인 총재정부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전보다도 더욱 보수적인 견해를 지니게 된 그는 1797년 봄의 선거로 왕당파가 세력을 잡았을 때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 그결과 이 선거를 무효로 만든 혁명력 5년 프뤽튀도르 18일(1797. 9. 4) 쿠데타가 일어나자 체포를 모면하기 위해 달아나야 했다.

그는 독일로 들어가 뉘른베르크에 정착했다. 혁명력 7년 브뤼메르 18일(1799. 11. 9) 쿠데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1통령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야 카르노는 프랑스로 돌아왔고, 1800년의 몇 달 동안 전쟁장관으로 활약하다가 사임했다. 그러나 1802년 원로원의 지명으로 구성된 법률심의기구였던 법제심의원(Tribunat)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제도를 반대하고, 나폴레옹에게 종신 통령직을 수여하는 데 반대표를 던졌으며, 나폴레옹을 황제로 하는 제국 수립을 용감하게 반대하는 등 통령체제에서 성장해가는 독재권력과 싸웠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법제심의원 의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1807년 의회가 법제심의원을 폐지한 때에야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814년 동맹군이 프랑스를 침입하자 다시 현역에 복귀해야 했다.

나폴레옹에게서 안트웨르펜 지사로 임명받은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카르노는 루이 18세의 왕정복고를 지지했으나 1814년 7월에 발간한 〈1814년 7월의 왕에 관한 회상 Mémoire au roi en juillet 1814〉에서는 부르봉 왕 치하의 지나친 반동을 규탄했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다시 잡아보고자 했던 백일천하 동안 내무장관으로 일했으며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저항할 것을 건의했지만 허사였다.

제2차 왕정복고는 카르노의 정치활동이 막을 내렸음을 알렸다.

1815년 7월 그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10월에 파리를 떠난 그는 1816년 1월 바르샤바에 정착했다가 그해 8월 다시 바르샤바를 떠나 마크데부르크로 갔고 그곳에서 7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의욕적으로 뿌리를 찾으려고 애썼던 제3공화국은 '승리의 조직자'로서 카르노를 떠받들면서 그의 유풍을 기렸다.

과학자인 사디 카르노의 조카이기도 한 그의 손자 사디 카르노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유해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옮겨졌다. 카르노는 진정 '승리의 조직자'였으나 이것은 공안위원회의 다른 위원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일이었으며,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포정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공안위원회는 비록 14개 군대를 모집하여 장비를 갖추고, 무장시키고, 먹여살리고, 또 이들을 이끌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업적은 어디까지나 대규모의 징집과 징발, 군수 생산의 국유화 등 혁명정부의 세력 이용을 배경으로 해서만, 즉 공포정치의 권력에 의지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카르노를 '승리의 조직자'로 성격지은 것은 테르미도르 쿠데타를 성공시킨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이다. 이들은 쿠데타로 제거해버린 사람들에게 공포정치의 책임을 돌리고 대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빛나는 승리의 영예를 듬뿍 안겨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