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핼리

에드먼드 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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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56. 11. 8, 런던 근처 쇼어디치 해거스턴
사망 1742. 1. 14, 런던 근처 그리니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천문학자·수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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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핼리와 뉴턴
  4. 후기 업적
  5. 핼리의 중요성

개요

나중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한 혜성(彗星)의 궤도를 처음으로 계산했다.

또한 Ⅰ.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를 출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그는 런던의 세인트폴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운 좋게도 현대사상의 기초를 확립한 과학혁명의 시기에 살았다. 4세 때 찰스 2세에 의해 군주제가 부활하게 되었고, 2년 뒤에 이 새로운 군주가 '보이지 않는 대학'이라고 불리던 자연철학자들의 비공식 조직을 허가한 뒤 이 조직은 공식적으로 런던왕립학회라고 알려졌다. 핼리는 1673년 옥스퍼드대학교 퀸스 칼리지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1676년에 왕립천문학자가 된 존 플램스티드에게 편지로 소개되었다.

그는 플램스티드가 연구를 하고 있던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하여 천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망원경을 사용하여 북반구 들의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던 플램스티드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 핼리는 남반구에서도 같은 일을 할 것을 제안했다.

아버지의 재정지원을 받고 찰스 2세가 동인도회사에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1676년 11월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서(학위를 받지 못하고 옥스퍼드대학교를 떠남) 영국령으로서 남부 대서양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항해했다. 나쁜 날씨 때문에 그의 모든 기대는 좌절되었지만 1678년 1월 고국에 도착할 때까지 341개 별의 적경·적위를 기록했으며, 수성의 태양면 통과관측과 진자관측을 수없이 했고, 몇몇 별들은 예전에 관측했던 것보다 밝기가 훨씬 더 감소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1678년 후반에 출판된 핼리의 별목록은 남반구 별의 위치를 망원경으로 측정한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이 별목록의 출판으로 천문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1678년 그는 왕립학회의 펠로가 되었고 왕의 주선으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핼리와 뉴턴

1684년 핼리는 처음으로 케임브리지의 뉴턴을 방문하여 중력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중력). 핼리는 런던에 있던 왕립학회의 3인조인 로버트 (발명가이며 현미경학자)과 크리스토퍼 (건축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이 두 사람은 케임브리지의 뉴턴과 함께 행성운동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문제는 과연 어떠한 힘 때문에 행성이 태양 주위를 전진운동하면서도 공간으로 떨어져 나가거나 태양으로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성공에 대한 열정과 감각, 그리고 과학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먼저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먼저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과학을 발전시키는 동기가 되었으며 그들 사이에 활발한 토론과 경쟁을 유발시켰다.

훅과 핼리는 행성을 궤도상에 있도록 만드는 힘이 행성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면서 감소된다는 것을 계산했지만,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관측된 행성운동에 맞는 이론적인 궤도를 유도해 내지는 못했다. 그후 핼리는 뉴턴을 방문했는데, 그때 뉴턴은 자신은 이미 그 문제를 풀었고 궤도는 타원일 것이지만 계산으로 그것을 증명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핼리로부터 격려를 받은 뉴턴은 천체역학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여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걸작 중의 하나인 〈프린키피아 Principia〉를 저술했다.

이 책에 대해서 왕립학회는 "핼리 씨가 검토하고 인쇄를 책임진다"고 결정했으며, 핼리는 이 일에 착수했다. 그는 뉴턴과 상의해서 뉴턴과 훅 사이에 일어났던,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에 대한 논쟁을 재치있게 무마했으며 〈프린키피아〉를 편집하면서 작가를 기리는 머리말에 라틴어로 찬미의 시를 쓰고, 증명을 고치고 검토하여 출판했다(1687).

후기 업적

핼리는 많은 양의 자료를 조리 있게 정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1686년에 제작한 세계지도는 대양에 분포하는 탁월풍(卓越風)을 나타낸 것으로는 최초로 출판된 기상도였다(기상학). 1693년에 출판한 브레슬로 시의 사망률 통계표는 인구의 사망률과 나이를 관련시켜 설명을 시도한 최초의 것들 중의 하나였으며, 나중에 생명보험회사의 보험통계표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생명보험).

1698~1700년에는 해군의 지시로 범선 파라모어 핑크를 지휘하며 최초의 순수한 과학적 목적의 항해를 했다.

이 항해의 목적은 남대서양에서의 나침반 눈금의 변동을 관찰하고 기항의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1701년 대서양과 태평양지역의 자기도(磁氣圖)를 처음으로 출판했는데, 나침반 바늘의 변동 등, 변화를 보이는 대양상의 위치가 곡선으로 나타났다. 입수할 수 있는 모든 관측기록과 항해 도중 자신이 관측한 것을 편집해서 만든 이 도표는 항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자성, 지구 자기장, 항해시스템). 관측천문학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계속하면서 1337~1698년에 관측된 24개 혜성의 포물선궤도를 수록한 〈혜성 천문학 개요 Synopsis of the Astronomy of Comets〉를 출판했다.

1531, 1607, 1682년에 관측된 3개의 혜성의 특징이 너무 닮았다는 것을 알아내어 이것은 같은 혜성이 계속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고(지금은 핼리 혜성으로 알려져 있음) 이 혜성이 1758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1716년 핼리는 태양시차(太陽視差)를 이용하여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1761, 1769년에 일어나리라고 예측된 금성의 태양면 통과현상을 관측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1720년 그는 플램스티드의 후임으로 그리니치 천문대의 왕립천문학자가 되었으며,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달의 자오선 통과시간을 관측하는 등 많은 관측을 했다.

핼리의 중요성

항해문제와 같은 과학의 실용적인 응용에 대한 핼리의 관심은 과학은 '인간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F. 베이컨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핼리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문적 과학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전문적인 능력도 보여주었다. 그는 뉴턴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고 연구가 완성되도록 끝까지 돌봐주어 서양 사상의 출현에 큰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