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보

스트라보

다른 표기 언어 Strabo
요약 테이블
출생 BC 64/63, 판터스 아머사이어
사망 AD 23 이후(?)
국적 그리스

요약 그리스의 지리학자·역사학자.

그의 〈지리학 Geography〉은 아우구스투스 왕의 재임기간(BC 27~AD 14) 동안 그리스·로마에 알려져 있던 국가와 민족들에 대한 내용들이 담긴 현존하는 유일한 책이다.

또한 많은 전문서적으로부터 인용한 내용들은 그 책에 포함된 국가들의 역사뿐 아니라 그리스의 지리학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스트라보의 외가는, 로마에 저항한 미트라다테스 5세(약 BC 150~120)와 미트라다테스 대왕(BC 132~63) 시절 중요 관직을 지낸 유명한 가문이었다. 스트라보를 가르친 첫번째 선생은 수사학의 대가였던 아리스토데모스였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스트라보를 가르치기 전에는 현재 터키의 술탄히사르에 해당되는 미앤드 강변의 니사에서 로마의 정치군사가던 폼페이우스(BC 106~48)의 아들들을 가르쳤다. 스트라보는 BC 44년에, 키케로의 스승이었던 티라니온 및 크세나르코스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키케로와 크세나르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일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스승이었던 아테노도로스는 스트라보에게 미래의 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해 많은 지식을 전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트라보는 아테노도로스의 영향으로, 모든 우주의 현상들은 유일한 1개의 근본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스토아 학파의 학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스토아 철학). 스트라보는 로마에서 적어도 BC 31년까지는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BC 20년경에 그의 중요한 첫번째 저서인 〈역사 스케치 Historical Sketches〉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BC 145~31년의 악티온 전투 또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집권 초기인 BC 27년까지의 역사가 실려 있다.

이 책은 다방면에 걸친 방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폴리비오스의 〈역사 Histories〉의 연속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인용내용만이 몇 개 남아 있다. BC 29년 스트라보는 그리스의 코린트로 가는 길에 에게 해의 기아로스 섬(지금의 이아로스 또는 니소스로 알려짐)을 방문했다. 당시 그곳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체류하고 있었다. 스트라보는 BC 25~24년에 이집트에 정통했던 아일리우스 갈루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아랍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나일 강을 따라 필라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AD 17년까지 스트라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7년에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로마 정복에 참가했으며, 이후부터는 그의 중요한 2번째 저서인 〈지리 스케치 Geographical Sketches〉의 편집에 주력했다. 그가 썼던 개인적인 기록에 의하면, 그가 집필을 시작했던 시기는 이집트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으며, BC 2년경부터 AD 14년 동안은 집필을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14년부터 다시 마지막 부분의 작업을 시작하여, 23년에 이 책을 완성했다.

〈지리 스케치〉의 제1·2권은 사실상 이전의 책과 저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지리학의 목적과 방법론을 서술한 것이다.

스트라보는 BC 276~194년에 생존했던 그리스 학자 에라토스테네스의 작도법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지도). 그는 에라토스테네스 해안선, 도로의 측량 결과와 함께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조합했지만,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스트라보는 BC 2세기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가 에라토스테네스를 반박한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지구에 대한 기술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히파르코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역사서와 함께 유럽 지역의 지리에 관한 책을 2권 집필한 폴리비오스에 대해서는, 지역과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기술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BC 135~51년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이며 철학자 포세이도니오스가 가지고 있었던 자연지리학과 민족지(民族誌)에 대한 지식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그가 제시했던 기후대의 개념, 특히 적도지역에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가설에는 반대했다.

이러한 비판적 연구들은 스트라보가 정사투영법 지도를 바탕으로 기술적인 지리학을 보다 중요시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스트라보는 자신의 저작이 수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자연자원·관습 등을 알아야 하는 정치가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라는 논리하에, 원형의 지구를 평면에 옮기는 지도투영법에 관해서는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았다.

스트라보는 제3~6권에서는 이베리아·골·이탈리아 등에 관해 기술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이들 국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는 폴리비오스와 포세이도니오스의 글에서 얻은 것이었으며, 그리스의 지리학자 아르테미도로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아르테미도로스는 BC 140년경에 태어났으며, 스트라보에게 해안선에 대한 자세한 사항들과 그러한 자료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구의 형태와 크기에 대한 지식을 준 항해기록이 담긴 책을 지었다. 제7권은 동일한 저자들의 기술내용을 근거로 다뉴브 분지와 흑해의 유럽 쪽 해안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그리스에 관해 기술한 제8~10권에서도 많은 내용들이 아르테미도로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Iliad〉에 기재되어 있는 도시 판별을 중요시했던 스트라보는, 호메로스의 작품에 대한 2명의 주석자들, 즉 BC 2세기경 아테네의 아폴로도로스와 BC 205년경에 태어난 스켑시스의 데메트리오스로부터 많은 양의 정보를 얻었다.

제11~14권의 내용은 흑해의 아시아 쪽 해안과 카프카스, 이란 북부, 소(小)아시아를 지리적으로 기술했다. 이 책들의 많은 부분이 스트라보 자신이 직접 탐험한 것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있었던 전쟁들에 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많이 인용했으며, 고대 트로이에 대해서는 호메로스 시대의 지형기술인 데메트리오스의 기술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인도와 페르시아가 기록되어 있는 제15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에 참가했던 역사가로부터 많은 정보를 제공받았으며, 메소포타미아·시리아·팔레스타인·홍해 등을 기술한 제16권은 BC 83~30년에 살았던 마르크스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보내온 탐험기록, 포세이도니오스가 서술한 민족지적 내용, BC 2세기경의 그리스 역사학자이며 지리학자였던 아가타르키데스의 홍해 항해기록에 크게 의존했다.

지중해의 아프리카 해안과 모리타니 지역을 다룬 제17권의 기술내용은 포세이도니오스·아르테미도로스의 기록과 이집트에 관한 스트라보의 개인적인 경험이 위주가 되고 있다.

스트라보는 그 자신이 아르메니아에서부터 서쪽으로 사르데냐의 맞은편인 토스카나 지역까지, 흑해에서 남쪽으로 에티오피아 근처까지 여행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방대한 저술에서 개인적인 여행기록이 차지하는 부분은 극히 적다. 심지어 그가 오랜 기간 동안 거주했던 이탈리아에 관한 내용에서도 단편적인 몇 가지 인상 이외에는 기록이 거의 없다.

스트라보의 책을 보는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내용들은 그가 인용한 자료들이 씌어졌던 시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스트라보는 각종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중에서 직접 관찰한 내용들을 뽑아 기록했기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거나 독창성이 부족함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그는 주어진 자료에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까지의 거리, 국가간·지방간의 경계선 파악, 주요한 농업·산업 활동, 정치체제, 민족적인 특성, 종교적 관습 등과 같은 정보를 추출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국가 또는 도시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시 및 국가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 경험했던 전쟁, 성장과 퇴락과정, 그곳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들과 함께 그것들이 성립되는 과정의 주변 여건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지질적인 현상들은 그것이 예외적인 현상이거나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요인이 될 경우에 기술되었다.

그러한 예로는 이베리아에서의 대서양의 조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화산지형,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나프타 샘, 나일 강의 유량 증가와 감소현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에 대한 내용은 3권에 걸쳐 기재되어 있지만,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 이것은 스트라보가 그리스의 경우에는 지리학적 의미에서의 지역성보다 호메로스의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지역성의 규명에 보다 더 치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호메로스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지리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호메로스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이 지역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그가 실제로 많은 지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스트라보는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메로스가 지중해 연안 지리에 관해 알고 있던 지식의 정확성의 문제는 스트라보의 소개로 인해 계속 유지될 수 있었고, 에라토스테네스의 회의적인 시각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의 저서들이 그리스 문화 전통의 습득에 있어 중요한 기여를 했음이 스트라보의 책으로 인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