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략

핵전략

다른 표기 언어 nuclear strategy , 核戰略

요약 핵무기의 구성·배치·운용을 둘러싼 군사전략.

목차

접기
  1. 국가전략과 핵전략
  2. 기본 억지 사상
  3. 세계 각국의 핵전략
    1. 미국
    2. 소련
    3. 영국
    4. 프랑스
    5. 중국
    6. 기타 나라
  4. 한국의 핵전략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되었던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에 비해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전략 사상을 일변시켰다. 핵무기는 그 거대한 파괴력 때문에 '궁극적 무기'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 무기의 사용으로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은 이제 영원히 회피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핵무기의 사용은 없었지만 전쟁은 계속 발생했으며, 그 사용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어 국제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핵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전쟁과 평화의 관계가 애매해졌다.

과거에는 군사력이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군사력을 행사하여 상대방의 저항을 봉쇄하고, 그로써 자신의 의사를 실현시키는 것이 가능했었다. 현대에 들어와 핵무기가 상대방의 보복공격의 수단으로 쓰이고, 그에 따라 핵전으로 발전하기가 쉽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 또한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으로 상대의 심리에 자극을 주는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핵무기의 등장과 함께 재래식 군사력도 핵무기의 전략과 비슷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상대방에 대한 움직임도 군사적 수단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경제·문화·심리 등 여러 수단이 동원되고 있다. 따라서 핵전략도 단순한 핵무기의 배치·운용에 따른 군사전략이라기보다는 핵무기의 존재를 배경으로 하여 국제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성격이 강해졌다. 이제 핵전략이라고 하면 핵을 둘러싼 정책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으며, 단지 군사적 성격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전략무기체제).

국가전략과 핵전략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의 핵전략은 2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선 평화시의 국가목표를 실현하려는 책략으로서의 정책(정략)이 있고, 2번째로 전쟁시에 군사력을 유효하게 사용하려는 전략이 있다. 현재 전략이라고 하면 국가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국제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정책의 의미가 강한데, 여기에 정치·외교·군사·경제·문화 등 국가의 전기능을 발휘하는 종합적 대책을 '국가전략'이라고 한다.

현대의 국가전략은 국가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국력을 동원하는 종합적 정책 개념이라는 인식과 함께 군사·경제·사상·문화 등의 국가기능에 대해서도 그 건설·유지·관리·운용 등을 둘러싼 부분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핵전략은 국가전략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세계의 군비는 이미 핵무기를 갖춘 체제로 돌입했는데,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미국·소련 양국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핵군비로 세계를 이분하는 지배력을 확립했었다. 미국·소련 양국은 이 핵군비를 배경으로 하여 국제정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양국은 핵군비의 우위를 보유하는 것이 국가전략의 중대한 목표가 되었다. 핵군비의 우위를 추구한 미국·소련 양국의 전략은 핵군비 경쟁을 격화시켜 미국·소련은 세계를 파괴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를 축적하여 '과잉살육'(overkill)이라는 상황을 만들었다. 종래의 미국과 소련 핵전략은 이들 양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나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핵시대에 들어와 동서 양 진영의 집단안전보장체제가 형성되어 동서의 동맹국은 서로 그 안전보장을 미국과 소련의 억지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동맹국은 집단적 안전보장에 의해 각 블록간의 결속을 중요시하게 되어 자국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미국과 소련의 세계전략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의 압도적인 핵전략을 바탕으로 하여 각 동맹국은 그 주권의 일부를 포기하고 미국과 소련의 전략에 협조하여 자국의 생존조차도 미국·소련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동유럽이 자유화되면서 미국·소련 양극 체제에 의한 동서간의 긴장이 완화되었으며, 양극체제가 다극화체제로 들어서는 과도기에 있다(→ 국제관계).

기본 억지 사상

현재 핵전략의 기본이 되는 것은 억지(抑止) 사상이다.

핵무기는 거대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용은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핵무기의 사용은 극력 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으로부터 핵에 의한 선제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핵공격을 받을 경우 적에 대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주는 보복공격 태세를 취하여 핵전쟁의 발생을 방지해보려는 것이 '억지 사상'이다. 이 사상은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 독점이 끝나면서 미국·소련 간의 핵무기 경쟁이 예상되기 시작하던 1950년대에 생겼다.

억지 사상은 1953년 7월 영국의 참모총장 슬레서 공군 원수에 의해 채용되었고, 이어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가 '대량보복'이라는 형태로 도입했다.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핵전략이론이 나타났지만 모두 억지 사상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이다.

억지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유효한 반격으로 보복한다는 공포심을 상대에게 불러일으켜 상대의 적대행위를 방지하는 조치'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억지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능력·비용·의도 등 3가지 조건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 능력은 적에게 아군이 보복조치를 취할 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납득시키는 것이고, 둘째, 비용은 적이 공격으로 얻은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며, 셋째, 의도는 아군이 충분히 보복행위를 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억지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전략을 '핵억지전략'이라고 한다.

핵강대국의 핵보복능력이 충분함을 보여주는 것에 의해 대규모 전쟁을 억지하는 것과 함께 핵강대국간에도 핵전쟁을 방지하며, 더욱이 소형의 핵전술 무기에 의해 국지전인 소규모 전쟁의 발생을 억지하는 전략도 채택되고 있다. 억지 전략은 이러한 핵무기 사용의 위협으로 전쟁을 억지하는 것과 함께 전쟁이 발생할 경우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는 위기관리의 정책도 포함되어 있다.

1970년 후반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재래식 병기에 의한 침략의 위험성이 높아지자 그 침략에 대항하여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재래식 무기의 증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재래식 무기에 의한 억지'(conventional deterrence)의 개념도 제창되었다.

핵억지론은 핵무기의 거대한 파괴력과 살상력에 의하여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상대의 행동을 구상단계에서 멈추게 하는 심리적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위협과 공포라는 심리상태는 대단히 애매하여 어느 정도의 핵무기가 어느 정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지 불확실하다. 공포심의 정도는 상대의 심리상태나 사회구조에 따라 크게 다르며, 상대에게 주는 공포심이 클수록 효과도 크다. 핵무기의 증강으로 상대에게 공포심을 크게 주면 줄수록 상대도 마찬가지로 핵무기의 증강을 꾀하여 핵무기의 증강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50~70년대에 미국과 소련 간의 끊임없는 핵군비 경쟁은 이와 같은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핵무기는 억지에 강점이 주어지는 무기이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는 무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는 무기가 되면 억지의 효과도 생기지 않게 된다. 이때문에 실제로 사용되는 핵무기가 필요하며, 한정적 핵전쟁의 전략이 수립되었다. 도시·공업 지대를 공격하여 대량 살육이나 대량 파괴를 행하는 핵무기 이외에도 국지전에 사용되는 핵포탄, 핵지뢰, 핵폭뢰, 단거리 핵미사일 등의 전술 핵무기가 개발된 것은 바로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전술무기체제). 핵억지를 강화하면 할수록 핵무기를 실전에 사용하는 전략과 핵공격의 피해를 국한하면서 현실에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가 필요하게 된다.

핵억지론은 핵전쟁의 억지를 위하여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일방 핵무기를 현실에 적용해야만 억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모순된 주장을 펴고 있다.

세계 각국의 핵전략

미국

미국의 핵무기 독점은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다.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고,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수소폭탄과 소형 원자폭탄의 개발에 착수하여 미국과 소련 양국은 핵폭탄개발 경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와중에 최초로 등장한 핵전략은 아이젠하워 정부의 뉴 룩(new look)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전략공군을 중시하여 침략에 대하여 그즉시 대량의 핵보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1954년 1월 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대량보복이라고 선언했다.

이 전략은 '대량보복 전략'이라고 불리는데, 그후 미국의 핵억지 전략의 원형이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소련은 미국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배치했고, 더욱이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실험에 성공했다. 또한 1957년 10월에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號)를 쏘아올려 핵 미사일 시대에 돌입했다. 미국의 인공위성계획 뱅가드는 2번에 걸쳐 쏘아올리는 발사단계에서 실패하여, 소련이 미사일 기술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미사일 갭 논쟁이 벌어졌다.

소련의 핵전력이 증강함에 따라 핵에 의한 대량보복능력이 미국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고, 미국과 소련 양측 어느 쪽이 선제공격을 감행해도 상대측의 핵공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공포의 균형'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핵에 의한 대량보복의 위협으로 국지전쟁을 억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결과 대량보복을 수정하여 소형핵무기를 개발하여 한정적인 전쟁에 대비하는 태도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것을 뉴 뉴 룩(new new look)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 핵전력이 정비되면서 대량보복 전략에 대한 비판이 표면화되었다. 핵무기는 파괴력이 거대하여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국지전쟁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재래식 무기를 갖춘 통상병력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961년에 등장한 케네디 정권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전면 핵전쟁으로부터 한정 핵전쟁 및 통상병력에 의한 국지전쟁으로의 전환 등 예상될 수 있는 모든 전쟁에 대처하는 것을 생각해내 '유연한 반응' 전략을 내놓았다.

이 전략은 각종 위협에 유연히 대응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전쟁을 억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을 펴낸 맥나마라는 핵전략에 대해서 적의 선제공격을 받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비취약 핵보복력을 중시했다. 맥나마라는 당초 적의 핵전력을 공격하는 '대 병력'(對兵力) 전략을 중시했었다.

그러나 소련의 핵전력의 비취약화에 따라 도시·공업 지대를 공격하는 '대도시'(大都市) 전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적의 핵전력을 공격하여 미국의 손해를 한정시키는 것과 함께 적의 기습공격을 받더라도 살아남는 핵전력으로 반격하여 '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의 손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확증파괴'(確證破壞) 전략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 이래 핵전략의 기초가 되었다.

이 확증파괴 전략에 대해서는 당초부터 비판이 있어왔다.

이 전략의 바탕에는 미국과 소련 양국의 도시·공업 지대를 상대의 핵공격에 대하여 취약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핵억지의 안정적 효과를 가져온다고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과 일반 시민의 대량살상을 기초로 하는 정책으로서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소련이 군사목표에 대하여 한정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일반시민의 피해가 한정되는 경우 과연 소련의 도시·공업 지대에 핵공격을 행하여 대량보복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핵전략의 수정이 1970년대부터 이루어져오고 있다. 확증파괴 전략의 수정에 착수한 것은 1969년 1월에 등장한 닉슨 정권이었다. 닉슨 정부는 닉슨 독트린에 의거하여 동맹국에 대한 방위약속의 축소를 시도했다. 또한 대(對) 소련 핵전력의 균형을 중시하여 '충분'(sufficiency) 전략을 제창했다.

이 전략은 소련의 도시·공업 지대에 대한 공격뿐만 아니라 군사목표의 공격도 고려에 넣은 것이다. 이것은 닉슨 정권의 말기에 슐레징거 국방장관에 의해 개발되었다. 슐레징거는 핵전략 공격의 타게팅 독트린(targeting doctrine)에 착수하여 도시·공업 지대에 대한 보복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군사시설을 핵전략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 전략은 후에 '유연반응' 전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전략의 채택과 함께 미국은 대 병력 전략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콘크리트로 방호되어 있는 미사일 사일로, 지휘관제 센터 등 하드 타깃(hard target)의 공격을 중시했다. 이 정책은 1977년 1월에 등장한 카터 정권에 의해 계승되어 핵전략 공격의 목표를 핵미사일·레이더·잠수함 등의 기지를 위시하여 지휘관제 센터, 핵저장시설 등에까지 확대했다.

카터 정권의 브라운 국방장관은 소련의 핵전략이 미사일 수와 총파괴력에서 우위에 있음을 지적하고 "소련이 갖고 있는 전력 우위 특질을 미국이 갖고 있는 다른 유리한 면으로 상쇄시킬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은 1980년 7월 핵공격 목표의 변경을 지시한 대통령령 제59호에 서명하여 이 '상쇄'(相殺) 전략의 시행을 확인했다.

닉슨의 충분 전략을 비롯하여 슐레징거의 유연반응 전략, 브라운의 상쇄 전략까지 일관되고 있는 미국의 핵전략 사상은 소련의 핵전력 증강에 대응하여 소규모의, 그리고 한정적 핵공격에서 대규모 전면 전쟁까지 예상되는 모든 양상의 핵공격에 대응하는 선택안을 가지고 이에 의해 핵억지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핵전략이론은 핵무기체계의 기술적 진보에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1966년의 핵미사일 다탄두(MRV)화에 의해 운반탄두 수의 비약적 증가와 유도장치의 개선에 의한 명중도의 향상 등 핵미사일 기지와 지휘관제 센터 등 다수의 군사목표에 대하여 정확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핵무기체계를 놓고 볼 때 전략폭격기, ICBM, 잠수함 발사탄도 미사일(SLBM)의 세 주력(主力) 간에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미국은 그 핵전략의 바탕이 되는 핵무기 기술개발의 측면에서 끊임없이 소련을 앞서왔다.

1950년대 중반 전략폭격기와 원자력 잠수함을 개발했고, 1960년대 초반 원자력 항공모함, 1960년대 후반에는 다목표탄두(MIRV)를 개발했다. 소련은 미국보다 5~10년 뒤진 상태에서 그뒤를 추격했다. 1980년대에 핵무기 개발속도를 늦추지 않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10월에 1980년대의 핵전력증강계획을 발표했다. 이것은 1982~87년에 2,250억 달러를 투입하는 계획으로서 신형탄도 미사일(MX) 트라이던트 Ⅱ형 SLBM, 지상·공중·해상(중) 발사순항 미사일의 개발·배치를 결정했다.

1983년말 핵전략무기의 탄두수는 약 9,000발 수준이었으나 더욱 늘어날 계획이었다. 전략방위의 분야에서도 탄도 미사일 요격 미사일(ABM)과 레이저 무기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미국이 신형 핵무기를 개발함에 따라 목표 공격의 정확도가 눈에 띄게 높아져 운반 핵탄두 수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소련은 이같은 미국 핵전력의 증강을 선제 핵공격 능력의 증가로 보아 미국과 소련 간에 끊임없는 핵경쟁이 벌어졌다.

미국의 핵전략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한정핵전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10월 유럽에 한정핵전쟁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1983년 11월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정에 따라 독일(당시 서독)·영국·이탈리아에 IRBM(퍼싱 H형, 지상발사순항 미사일)을 배치했다. 이 조치는 소련이 IRBM SS20을 동구권에 배치한 데 대한 대응조치였는데, 유럽 각국은 미국이 한정핵전쟁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깊이 우려했다. 미국의 핵전력 증강의 배후에는 군부와 연결되어 있는 군수산업의 압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주요 군수산업체는 약 4,000개사로서 미국 정부 무기조달비의 약 50%를 이들 회사 중 상위 25개사가 수주하고 있다. 군산복합체는 군사전략, 신무기체계의 개발·조달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핵전력의 증강도 신형 핵무기의 개발에 의해 군사산업의 유지·확대를 꾀해온 거대 무기산업계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

소련의 핵전략은 미국과 같이 명백한 핵억지이론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미국의 핵전략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제1격으로부터 살아남아 미국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보복을 행하는 비취약한 전략핵전력의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1949년 8월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이어 1953년 8월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한 소련은 1957년 8월에 세계 최초의 ICBM 실험을 했고, 이어 1959년 12월에는 전략 로켓군을 창설했다. 흐루시초프 제1서기 겸 총리는 1960년 최고간부회의의 연설에서 핵 로켓 제일주의를 주장하여 당시의 총병력 362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삭감하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위기와 함께 이 삭감안은 중지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함께 등장한 브레주네프는 흐루시초프의 핵 로켓 제일주의를 버리고 통상군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1961년에 케네디 정부가 등장하여 유연반응핵전략으로 이행하여 통상병력의 증강을 중시하는 데 대한 대응책인 것으로 여겨진다. 1964년에 폐지된 지상군 총사령부는 1967년에 부활되었고, 그때부터 통상전력을 중시하는 논문이 많이 발표되었다.

소련은 1960년대 중반부터 급속한 핵전력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1966년 4월의 제23회 당대회에서는 말리노프스키 국방장관이 "모든 종류의 핵탄두 스톡을 증대하여 이것을 사용하기 위한 장비를 준비한다"라고 보고하여 전략 로켓군의 충실을 과시했다. 미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1960년대말 ICBM 수에 있어서는 미국을 추월했으며, SLBM 수에 있어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이러한 핵전력의 균형 때문에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1)이 1969년 11월부터 개최되었다.

1972년에는 SALT-1이 타결되어 전략무기의 수량적 상한이 설정되면서 전략무기의 근대화 계획이 급진전되었다. 1974년에는 4종류의 신형 미사일 실험이 행해졌고, 그 다음해인 1975년에는 SS17·18·19가 작전배치되었다. 또한 이해에 MIRV 장비의 미사일 배치가 시작되었다.

SLBM의 분야에서도 1972년에 델타급 신형 원자력 잠수함의 배치가 개시되었고, 이어 1980년에는 배수량 3만t의 타이푼급 원자력 잠수함 1호함이 진수되어 1983년에는 작전·배치되었다. 이들 잠수함은 장거리 사정의 SSN8·18 등의 미사일에 탑재되어 있다. 미국에 비해 늦어졌던 전략폭격기에 있어서도 1983년부터 신형인 블랙잭의 시험비행이 시작되었다. 이외에 전략핵무기와 전술핵무기의 중간 분야인 신형무기도 개발되어 1975년부터 중거리 폭격기 투폴레프 Tu26 백파이어의 배치가 시작되었고, 1977년부터는 사정거리 5,000km인 MIRV 3발을 장착한 기동형의 KRBM SS20이 배치되었다.

1983년말에는 백파이어 180기, SS20은 360기를 기록했다. 미국에서는 소련의 핵전력 증강에 따라 소련의 핵전력에 대한 우려가 점점 높아졌다. 미국측은 소련의 핵전략이 핵무기에 의한 전쟁의 억지보다는 핵무기를 전쟁수행의 수단으로 보아 핵전쟁으로 승리하려는 생각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소련의 핵전력이 증강됨에 따라 미국은 지상에 고정 배치되어 있는 ICBM은 소련의 선제공격에 의해 대부분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로 핵군비 확장을 시도해왔다.

영국

영국은 1952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아의 몬테베로 제도에서 처음 핵폭발 실험을 행한 이래 독자적인 핵전력 보유의 길을 걸어왔다.

핵전력은 액체연료의 IRBM 블루스트리크의 개발에서 미국의 스카이볼트 미사일의 도입으로 바꾸어 1962년에는 폴라리스 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함의 도입을 결정했다. 영국은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핵탄두는 영국 독자의 것) 탑재 원자력 잠수함 4척을 주축으로 했었다. 1990년대에 구식화한 폴라리스를 미국제의 트라이덴트 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함으로 바꾸고 있는 중이다. 영국의 소규모 핵전력은 '최소한 억지'(minimum deterrence) 전략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소련이 서구의 주요도시에 대하여 핵공격을 해올 경우 영국은 소련에 대하여 보복공격을 행하여 소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있다.

소련의 50개 도시를 공격하면 소련 인구의 20%, 공업능력의 40%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으로 소련의 핵공격을 억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프랑스

프랑스의 핵전력 개발은 일관되게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특히 1958년 6월 드 골 정권이 성립한 이후에는 독자의 핵무장을 추구해왔다. 1960년 2월 사하라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핵무장법이 성립되었다. 드 골 대통령의 국방방침은 "프랑스의 방위는 프랑스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유사시에는 다른 나라들과 동맹하겠지만 방위는 프랑스 자신을 위해서도 독자적인 책임하에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핵전력은 지하 사일로로부터 발사하는 IRBM SSBS 18기, SLBM 16기 탑재 원자력 잠수함 5척, 미라주 IVA형 폭격기 34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의 핵전략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대도시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

중국은 1964년 10월 최초의 핵폭발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소련·영국·프랑스에 이어 5번째로 핵보유국이 되었다.

더욱이 1967년 6월에는 최초로 수소폭탄실험을 수행했고, 1970년 4월에는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 1980년 5월에는 남태평양을 향하여 ICBM 실험을 실시했고, 핵전력의 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의 핵전력은 4기의 ICBM, 10기의 IRBM T3, 50기의 IRBM T2, 50기의 MRBM(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T1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핵전략은 최소한 억지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소련이 압도적인 핵전력으로 공격을 해온다면 중국의 핵전력은 상당부분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핵미사일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소련의 도시들을 공격할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핵보복에 의한 피해를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중국에 대하여 행동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러한 최소의 억지 전략에 바탕을 두고 소련의 선제공격에 대하여 핵잔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SLBM 등을 개발했다.

기타 나라

유럽에서 중립정책을 취하고 있는 스위스·스웨덴은 미국과 소련의 양 진영에 속하지 않고, 그 어느 쪽에도 핵보장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또 양국은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여 핵무기를 보유·제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분명하게 밝혔다. 두 나라는 총력방위의 방위정책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침략의 경우 전국민을 동원하여 저항하는 방위전략을 취하고, 핵공격에 대해서는 셸터(대피소)에 의한 민간방위를 중시하는 특수한 대응책을 취하고 있다.

두 나라는 핵공격시 시민을 지킬 수 있는 셸터의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중립국은 강대국에서 핵공격을 해온다고 하더라도 전국토를 파괴하는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에 핵전쟁이 시민생활에 끼칠 영향에 대해 더 중시한다. 스위스에서는 전국민의 50% 이상인 350만 명, 스웨덴에서는 70%인 550만을 수용하는 셸터를 건설하는 등 핵폭발과 방사성 물질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외에 연료·식량 등도 국민생활을 장기간 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비축해 놓고 있다.

그밖에 일본은 국민들의 강한 핵거부 반응을 감안하여 '핵무기를 갖지 않는다, 만들지 않는다, 반입하지 않는다'의 비핵 3원칙을 핵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일본의 비핵 3원칙의 문제점은 미군에 의한 핵반입이다. 재일(在日) 미군에 관하여 ① 배치의 중요한 변경, ② 장비의 중요한 변경, ③ 전투작전 행동 등에 대하여 미국과 일본 간에 사전협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장비의 중요한 변경은 핵반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미·일안보체제에 의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핵위협이나 핵공격은 미국이 억지해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핵전략

한국은 6·25전쟁 후 주한 미국 소유의 핵무기를 1958년부터 한반도에 배치했으나 1975년 NPT에 가입함으로써 핵무기를 보유·제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또한 한국에 배치되었던 핵무기는 공식적으로 1991년에 완전히 철수되었다. 한편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했으나 체제유지 및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꾸준히 핵을 개발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영변에 설치되어 있는 2기의 핵원자로의 상태를 보아 북한은 거의 핵을 보유한 수준에까지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의 핵시설에 대하여 6차례에 걸쳐 사찰을 실시하여, 북한측이 이 기구에 제출한 자료와 사찰 자료 사이의 중대한 불일치를 밝혀냈다. 이 불일치는 영변에 있는 실험용 원자로에서 수거한 연료 견본에 대한 분석 결과와 당초 북한이 제시한 이 원자로의 운전기록 간에 나타난 것이다. 원자폭탄 제조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의 추출량과도 관계가 될 수 있는 이 중대한 불일치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사용이 끝난 연료봉 등 핵폐기물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이나 북한측은 핵폐기물 관련 시설로 보이는 영변내 두 시설에 대해 사찰관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IAEA는 북한측에 특별사찰을 계속 요구했다.

이와 같은 국제적 압력에 봉착한 북한은 급기야 국제사찰을 피하기 위해 1993년 3월 12일 NPT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IAEA는 탈퇴가 공식 선언되는 3개월 뒤인 6월 11일까지 북한의 탈퇴 철회를 종용했으나 북한이 응하지 않아 이 문제는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까지 올라갔다.

북한이 핵무장을 할 경우 이웃 나라인 일본도 자구책의 일환으로 핵무장을 들고 나올 것이며, 이렇게 되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는 일본의 핵무장으로 동북아시아 안보 구조에 결정적인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미국, 러시아 연방, 중국, 일본 등의 정부와 폭넓게 접촉하면서 북한의 탈퇴 철회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남북한 군사기지의 동시사찰, 팀스피리트 훈련의 조정, 경제협력의 재개, 북한의 대미·대일 관계 개선, 대북 불가침 보장 등의 조건을 내걸고 북한이 NPT에 복귀할 것을 설득했다.

한편 북한은 이러한 한국 정부의 제안에 대해 1993년 4월 8일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외세의존정책 포기, 주한 미군 철수의지 표명,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미 핵우산 탈피 등의 4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한편 NPT 체제의 유지를 희망하는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탈퇴 철회를 꾸준히 종용해왔다. 미국은 북한의 태도를 바꾸는 데 있어 강경책을 쓸 경우 제3세계 국가들의 반발이 우려되고 NPT 체제의 와해를 초래할 수 있어 유화책을 썼다. 그결과 1993년 6월 2~10일 미국과 북한 간의 대표회담이 뉴욕 시에서 개최되었다.

북한측의 강석주 외교부 제1부장과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는 3차에 걸친 회담에서 북한측이 필요한 기간만큼 NPT 탈퇴를 유보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사용의 금지,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보장,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등을 합의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이같은 합의에 발맞추기 위해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한국내 미군기지 공개 등 북한 측 요구의 수용을 검토하기로 했다. 한편 미국은 한반도 핵문제에 대하여 다음의 3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첫째, 북한이 NPT에 잔류하게 하고, 둘째, 북한으로 하여금 IAEA의 핵사찰을 받아들이게 하며, 셋째, 남북한간 상호 핵사찰을 실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핵전략은 북한의 향후 태도에 따라 그 구체적 형태가 결정될 것이며, 비록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했다고는 하나 IAEA의 사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