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주네프

브레주네프

다른 표기 언어 Leonid Ilich Brezhn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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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6. 12. 19, 러시아 카멘스코예(지금의 우크라이나 드네프로제르진스크)
사망 1982. 11. 10, 모스크바
국적 소련

요약 20세기의 냉전 기간 중 18년 동안 소련의 지도자였다.
1920년대에 토지측량사였던 브레주네프는 1931년 소련공산당(CPSU)에 가입하여 드네프로제르진스크 야금연구기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35년에 졸업한 후 한 공업기술학교에서 엔지니어 겸 감독으로 일했으며, 지방당의 여러 직책도 맡았다. 그는 스탈린 정권하에서 출세길이 열려 1939년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지구당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 1960년 5월 7일 최고간부회의의 정회원으로 뽑혔으며, 명목상의 소련국가원수인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4년 7월 15일 의장직을 사퇴하고 중앙위원회의 제2서기로서 흐루시초프의 보좌관이 되었으며, 3개월 후 흐루시초프를 축출한 연합세력에 가담한 결과 그의 뒤를 이어 CPSU의 제1서기(1966년 이후 서기장으로 개칭)가 되었다(1964. 10. 15). 단기간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의 '집단지도체제'를 거쳐 브레주네프는 명실상부한 제1인자로 부상했다. 당의 수반으로서 브레주네프는 공산 진영 내 유대를 강화했고, 소련의 군사력을 현대화했다. 1971년 4월 9일 CPSU의 총서기직에 재선되었으며, 1976년 5월 8일 소련군 원수로 진급하여 스탈린을 제외하고는 군의 최고 계급장을 단 유일한 당 지도자가 되었다.

사실상 18년 동안 소련의 지도자였다.

1920년대에 토지측량사였던 브레주네프는 1931년 소련공산당(CPSU)에 가입하여 드네프로제르진스크 야금연구기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35년에 졸업한 후 한 공업기술학교에서 엔지니어 겸 감독으로 일했으며, 지방당의 여러 직책도 맡았다. 그는 스탈린 정권하에서 출세길이 열려 1939년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지구당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적군(赤軍)에서 정치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계속 진급하여 소장이 되었고(1943), 우크라이나 전선의 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전후에 브레주네프는 다시 우크라이나에서 여러 지구당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50년에는 몰다비아(지금의 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다.

1952년에는 다시 승진하여 CPSU의 중앙위원회위원, 중앙위원회 최고 간부회의의 후보위원, CPSU 서기국 국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브레주네프는 중앙위원회에서 맡고 있던 직책들을 내놓고 중장 계급으로 국방부 정치국의 부국장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자흐스탄 공산당의 제2서기직으로 전임되었다(1954). 그 직책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직계 부하가 되어 흐루시초프의 야심적인 카자흐스탄 처녀·유휴지 개발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브레주네프는 이내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승진했으며(1955), 1956년에는 CPSU 중앙위원회에 다시 선출되었다. 1년 후 흐루시초프의 제거를 꾀한 '반당분자들'의 숙청 작업을 충실히 이행한 후, 1960년 5월 7일 최고간부회의의 정회원으로 뽑혔으며, 명목상의 소련국가원수인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4년 7월 15일 의장직을 사퇴하고 중앙위원회의 제2서기로서 흐루시초프의 보좌관이 되었으며, 3개월 후 흐루시초프를 축출한 연합세력에 가담한 결과 그의 뒤를 이어 CPSU의 제1서기(1966년 이후 서기장으로 개칭)가 되었다(1964. 10. 15). 단기간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의 '집단지도체제'를 거쳐 브레주네프는 명실상부한 제1인자로 부상했다.

당의 수반으로서 브레주네프는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와 국내 경제개발을 포함한 많은 국사를 동료인 코시긴과 최고간부회의 의장 니콜라이 V. 포드고르니에게 맡겨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

브레주네프는 대외 문제와 국사 문제에 집중했으며, 소련 내의 이념 대립을 없애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는 1961~64년에 외국을 널리 여행했으며, 공산 진영 내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모든 공산국가들도 방문했다(1965).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가 알렉산더 두프체크의 지도하에 공산 정권 체제와 당의 통제를 자유화하려고 시도하자(1968), 서양에서 브레주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진 이론을 만들어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정당화했다.

1970년대에 브레주네프는 새로운 공존정책을 내세워 서방측, 특히 미국과의 긴장 완화를 시도했다(데탕트). 그와 동시에 소련의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고 현대화시켰으며, 개발도상국가들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국내 정책에서 그는 내분을 해소하고 특히 농업과 소비재 분야에서 소련 경제의 능률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그러나 두드러진 성과는 없었음). 1971년 4월 9일 CPSU의 총서기직에 재선되었으며, 1976년 5월 8일 소련군 원수로 진급하여 스탈린을 제외하고는 군의 최고 계급장을 단 유일한 당 지도자가 되었다. 집단제도체제는 그가 1977년 5월 24일 포드고르니를 최고간부회의 의장직에서 해임함으로써 끝났다. 6월 16일에 브레주네프가 그 직위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그는 최고간부회의와 CPSU의 최고위직을 겸임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양 직책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