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전

게릴라전

다른 표기 언어 guerrila warfare 동의어 유격전, 遊擊戰

요약 비정규군이 정규군을 상대로 소규모의 제한된 싸움을 벌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전투 형식.

목차

접기
  1. 개요
  2. 전략과 전술
  3. 게릴라전의 물리적·사회적 구성요소
  4. 게릴라의 법적 지위
  5. 역사
  6. 반게릴라전
게릴라전(guerrila warfare)
게릴라전(guerrila warfare)

개요

유격전이라고도 하며, 대개 보다 큰 정치군사적 전략의 일환으로 치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게릴라는 정규복장을 착용하지 않고 약식무기와 장비를 사용하며, 공식 보급선이 없고 고도로 변칙적인 전술을 쓴다. 이 전술은 극도로 기민하고 공격적인 전투행위뿐만 아니라 사보타지와 테러를 포함하여 모든 심리전을 망라한다.

이러한 형식의 전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게릴라(스페인어로 '소전투'의 뜻)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영국 웰링턴 공작의 이베리아 원정(1809~13)때였다(→ 반도전쟁). 그때 장군을 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스페인-포르투갈의 비정규군을 게리예로스(guerrilleros)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빨치산(partisan)이 게릴라와 동의어가 되었다.

전략과 전술

게릴라전의 대체적인 전략은 아군이 정규전으로 적을 격파하기에 충분한 군대를 모을 때까지, 또는 적이 대내외적으로 정치·군사적 압력에 시달려 평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변화무쌍한 전술로 적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정치적·사회적·경제적·심리적 요인을 포함하며 정신적으로 강하고 물질적으로 약한 측을 위한 전략이다.

게릴라전의 기본 원칙은 중국의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BC 350년경 중국의 손자(孫子)는 훗날 게릴라 지도자들의 귀에 익은 말로 그의 휘하 장군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는 곧 위태롭지 않고, 하늘을 알고 땅을 알면 승리는 곧 완전할 것이다"(故曰 知彼知己 勝乃不殆 知天知地 勝乃可全), "군사의 정(情)은 신속함을 주로 한다.

남이 미치치 못함을 틈타, 생각지도 않는 길을 따라 그 경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는 것이다"(兵之情主速 乘人之不乃 由不虞之道 攻其所不戒也).

손자병법의 요체는 유럽의 병법학자들에 의해서도 종종 거론되었다. BC 4세기에 크세노폰은 전투에서 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언급했고, 18세기에 프랑스군의 사령관 삭스 원수는 전투를 하지 않고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지켜본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병력이 약한 나라는 적군을 격파하여 승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유격전으로 적의 세력을 소모시켜 전쟁 수행 의지를 꺾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격전에 의한 적군의 소모 과정은 작전 무대가 충분히 넓고 지형이 험준하며, 유격병들이 잘 훈련되어 있으면 추진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동시대의 코사크병 장군으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퇴각중에 유격대를 지휘한 데니스 바실리예비치 다비도프는 이런 종류의 전투는 적과 적의 작전기지 사이에 놓인 전지역을 무대로 한다고 기술했다. 거의 1세기 후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아랍부족군을 '전방도 후방도 없이 안개처럼 떠돌아 종적을 잡을 수 없는 신출귀몰의 부대'로 만들어 병력이 5배나 되는 터키군을 궁지로 몰았다.

로렌스가 아라비아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친 지 10년 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농민전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27년 이래 그는 동지들과 함께 국민당과 장제스 총통에게 쫓기고 있었다. 마오는 푸젠 성[福建省]과 장시 성[江西省]의 경계 지방에서 농민과 비적(匪賊)들을 모아 중국 최초의 공산군을 조직했으며, 이 공산군은 그후 8년 동안 장제스의 군대와 사투를 벌였다. 그 경험으로 마오는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이론은 장의 군대에게 쫓겨 공산당원들이 산시 성[陝西省]의 옌안[延安]까지 9,656㎞의 대장정(大長征)에 오를 때 시험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마오는 혁명 전 이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일본 침략군과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정규군을 2대 적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반식민·반봉건의 나라였고,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뒤떨어진데다, 인구가 조밀하고 지형이 복잡하며 통신시설이 빈약한 나라였다.

여기에서 마오는 결론을 내렸다. 즉 게릴라전은 적의 소규모 군대를 섬멸하고, 대군을 괴롭혀서 약화시키고, 적의 통신망을 공격하고, 적의 후방에서 독자적인 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하며, 적군의 힘을 분산시키고 이 모든 활동을 멀리 떨어진 전방에 있는 정규군의 활동과 보조를 맞추어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게릴라 부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이동하며 치고 빠지고, 작전 기지를 가능하면 방어하되 그렇지 않으면 즉각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릴라전으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으며 또 그 목적이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 만큼 "영토를 획득했다고 기뻐할 이유도 없고 잃었다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게릴라 전술은 신중한 계획을 요한다.

게릴라전은 총검 돌격보다 월등히 지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좋은 계획과 우수한 정보가 필수적이다. 그러한 정보는 인민에게서만 얻을 수 있으며 또 인민은 그러한 정보를 적에게는 감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마오는 역설했다. "많은 사람들은 게릴라들이 적의 후방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인민과 군대 사이에 존재하게 마련인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비유컨대 인민은 물이요 군대는 물고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 양자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군기가 형편없는 군대만이 인민을 적으로 만들고 물에서 나온 고기처럼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오의 세력기반은 인민, 즉 고기를 생산하고 부양하는 물이었다. 옌안의 은신처에서 그의 공작원들이 사방으로 나가, 군대를 조직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지원자를 모아 선전원으로 이론 교육과 훈련을 시켰고, 그 선전원들이 시골로 가서 농민들을 모집함으로써 마오의 세력은 구축되어갔다. 마오 이론은 중국과 쿠바가 아시아·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에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민족해방전쟁'의 청사진이 되었다.

게릴라전의 물리적·사회적 구성요소

첫째, 동기이다.

혁명을 일으키고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대의가 필수불가결이다. 대의는 여러 가지로 위장될 수 있지만, 결국 인민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정치적 목표이다. 마오는 이 점을 명백히 했다. "정치적 목표가 없으면 게릴라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그 정치적 목적들이 인민의 열망과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들의 협력과 도움은 얻을 수 없다."

둘째, 민중의 지원이다.

혁명가들의 저술에서 한결같이 강조되는 것이 게릴라와 인민의 일체감이다. 터키에 대항해 일어난 아랍 반군을 지휘한 로렌스는 작전 지구의 주민들에게 반군의 동태를 적에게 밀고하지 말아달라는 요구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지방을 장악한 것은 그 지방의 주민들이 자유의 이상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정신무장이 되었을 때라고 술회했다. 적군의 유무는 2차적인 문제였다는 것이다. 비공산주의자로 키프로스의 반란을 지도한 게오리기오스 그리바스 장군은 "과반수 국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서 게릴라전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기술했다.

셋째, 조직이다.

장기간에 걸친 혁명전은 정치 군사 양부문에서 고도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 마오는 세포당(細胞黨)에서 시작하여 현(縣)·성(省)·지방(地方) 당을 거쳐 최고 사령부에 이르는 비밀조직을 권장하고 있다. 마오는 게릴라 분대의 인원을 9~11명으로 규정했다.

넷째, 무기이다. 게릴라는 필연적으로 아주 다양한 무기를 자가 제조·포획하거나 외부로부터 공급받아 사용한다. 자체 생산해서 사용하기에는 화염병 또는 플라스틱 폭탄 등이 적당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보다 효과적인 것도 없다.

다섯째, 지형이다.

혁명은 농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마오의 지론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의 혁명이 도시에서 결정된 후 농촌으로 전파되었으며, 아일랜드의 반란도 주로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키프로스 섬 전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한 그리바스 장군은, 게릴라전이 반드시 농촌을 근거로 할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게릴라전만으로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상반된 주장을 했다.

여섯째, 테러이다.

게릴라전의 가장 무서운 특징의 하나가 암살, 군중을 향한 수류탄 투척, 무차별 폭격 등 테러의 자행이다.

일곱째, 은신처이다. 게릴라군은 줄곧 싸우고만 있을 수 없다. 자의건 타의건 물러나 쉬면서 기운을 회복하고 무기를 정비하고 신병에게 이론교육과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한 은신처는 전통적으로 멀리 떨어진 산간 지방이나 삼림 속에 위치하지만, 마을이나 촌락 전체가 은신처가 될 수도 있다.

또 이베리아 반도 전쟁 때 영국 해군이 웰링턴 장군을 돕는 포르투갈-스페인 게릴라들에게 제공한 것처럼 바다가 될 수도 있다. 또 게릴라 활동에 동조적인 인접국이 은신처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리스 내전(1946~49)중에 공산 게릴라들은 빈번히 유고슬라비아로 후퇴했으며, 호치민의 게릴라들은 프랑스와의 전쟁 후기에 중국을 피난처로 이용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은신처는 인민이 제공한다. 키프로스의 반란 때 그리바스 장군은 거의 2개월 동안 영국군에 포위되어 그의 소재가 파악된 상황에서도 거듭 체포를 면할 수 있었으며, 알제리의 한 반란군 지도자는 알제리의 정부군 사령부에서 200m도 안되는 거리에 몇 달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무사했다.

마지막으로 지도자와 신병모집이다.

게릴라군이 살아남아 세력을 떨치기 위해서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리더십). 지도자는 남다른 지능과 용기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기의 대의에 대한 거의 광적인 믿음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안된다. 레닌, 트로츠키, 마오쩌둥, 티토, 필리핀의 루이스 타룩, 케냐의 조모 케냐타, 호치민, 보구엔지압, 알제리의 아메드 벤벨라, 카스트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같은 지도자들은 모두 비범한 성격의 소유자로 일반적으로 출신이 미천했지만, 추종자를 지도하고 조직화하고 혁명의 열정을 불어넣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신병모집은 선발기준에 합격하는 자만을 뽑는 것이 원칙이다.

게릴라전에 수반되는 역경과 위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참을성있고, 대의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전쟁과 같이 게릴라전이 대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는 경우에는 선발원칙을 버리고, 지원자는 무조건 받아들여 한두 번 일선 부대에 보내 간접적으로라도 전투경험을 하게 한 뒤 게릴라 정예요원 자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게릴라의 법적 지위

역사적으로 정규군 사령관은 게릴라에게 일체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독립전쟁 때 프랜시스 매리언에게 여러 번 호된 맛을 본 영국군 장교들은 매리언이 '신사'답지도 '그리스도교인'답지도 않게 싸운다고 불평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폴레옹군의 장군들은 스페인-포르투갈 게릴라들에 대해 프랑스군 포로를 사살하는 게릴라는 모조리 죽이겠다는 격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혔다.

같은 문제는 미국의 남북전쟁 때도 일어났다.

켄터키 서부의 북군 사령관 엘리에이저 A. 페인 장군은 게릴라들에게 몹시 시달림을 당하자 이렇게 선포했다. "나의 작전지구에서 붙잡히는 게릴라는 남김없이 사살할 것이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여러분 남부의 형제들이 연방군의 병사 1명을 사살한다면 나는 여러분의 부유한 은행가와 목화 농장주 5명을 끌어내어 그들을 사살하게 할 것이다"(리처드 베네트의 〈흑인과 황갈색인 The Black and Tans〉, 1959).

1874년의 브뤼셀 국제회의는 게릴라가 교전국 군인으로 적법한 대우를 받으려면 그들 나름대로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뚜렷이 구별되는 배지를 착용하고 무기를 공공연하게 휴대하며 작전 수행에 있어 전시의 법규와 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했다.

1899년과 1907년에 열린 육전(陸戰)의 규칙에 관한 헤이그 회의는 이 정의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으며, 그것은 전시 법규에 관한 제네바 조약(1949)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헤이그 결정은 게릴라전의 이점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준수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 결정에 따르면 게릴라는 한결같이 재판도 받지 못하고 고문이나 위협을 당해왔다. 19세기초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와 같이 게릴라는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잔인한 행위를 계속해 왔으며, 이러한 악순환은 스페인 내란, 제2차 세계대전시 각국의 빨치산 활동, 베트남 등지에서 절정에 달했다.

역사

고대와 중세의 사서에는 게릴라식 전투의 예가 무수하게 나온다.

그러나 현대적 게릴라전의 기원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인디언과의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식민지 주민들은 곳곳에서 총잡이 부대를 결성하여 고도로 변칙적인 전술로 영국의 정규군을 공격했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습지의 여우'로 명성을 떨친 프랜시스 매리언이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정규독립군을 돕는 '부랑자' 유격대를 조직해 찰스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 후방을 계속 기습·유린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웰링턴 공(公)의 이베리아 원정 때 그를 도운 스페인- 포르투갈 게릴라들이었다. 막강한 프랑스군은 곳곳에서 게릴라 부대들의 기습 공격으로 통신이 끊기고 길이 막히는 가운데 악전고투하다가 4년 만에 결국 프랑스로 퇴각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회군할 때 러시아의 농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코사크 기병대와 합동작전으로 프랑스군을 줄곧 추격하면서 괴롭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 전쟁).

게릴라전은 나폴레옹 시대 이래 독자적으로 또는 보조적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어왔다.

독자적인 게릴라전의 두드러진 예의 하나는 중국의 태평천국운동(1850~64)이다. 궁핍해진 농민들과 일거리를 잃은 노무자들, 아편 밀수업자, 그리고 해적 등에 의해 시작된 이 청조(淸朝) 타도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약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릴라전이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을 상대로, 모로코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발칸 제국에서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상대로, 그리고 서부개척 때는 미국인을 상대로 인디언들에 의해서 행해졌다.

1899~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은 서구 열강을 상대로한 것이었고 1899~1902년의 필리핀 봉기는 미국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이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같은 19세기 후반기의 보조적인 게릴라 작전의 기록 또한 인상적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가장 성공적인 게릴라 지도자는 남군의 기병장교 존 모스비였다. 그는 소수의 의용 기마병을 거느리고 버지니아 북부에서 끊임없는 기습공격을 가해 북군의 작전을 계속 방해했다.

그때문에 북군은 게릴라군의 근거를 없애기 위해 그 지역 전체를 황폐화시키는 고육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이끈 멕시코 게릴라들은 멕시코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쟁이 정체되어 주전장(主戰場)인 서부전선에서는 게릴라전이 벌어질 여지가 없었지만, 보조 무대인 중동에서는 터키에 반기를 든 아랍 부족들을 지휘한 영국군 장교 T.E. 로렌스가 게릴라전으로 터키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는 다른 게릴라전이 러시아에서도 펼쳐졌다(→ 1917년 혁명). 1918년 러시아에서는 레닌의 볼셰비키파가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반혁명군인 백러시아군과 싸우고 있었는데,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들이 백러시아군을 지원했다.

이 지원으로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이 자극되어 많은 농민이 빨치산 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지휘하에 일본의 침략군과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중국 본토를 장악했다.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좌익정부가 정부군을 규합할 때까지 게릴라들의 활약에 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 내란). 결국 프랑코 반란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들이 반란군을 돕고 러시아가 정부군을 도움으로써 뚜렷하게 이념적인 성격을 띠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의 게릴라전은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대부분의 피침략국들은 공산당이 결성되어 보통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원들이 게릴라전을 벌이기에 적격이었다. 특히 발칸제국과 극동의 공산당 간부들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벌이는 게릴라 부대들을 결성하여, 연합국의 전쟁 노력에 크게 공헌했으므로, 정치 목표보다 군사 전략을 중시한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서방 국가들로부터 막대한 무기와 장비의 지원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일군의 잔혹 행위에 분격한 농민들이 수많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총 25만 명이 넘는 독일군을 죽이고 수천 대의 열차와 트럭을 폭파하여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전과를 올렸다.

몇몇 나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결성된 공산 게릴라군이 공산당 정부의 수립에 큰 역할을 했다.

티토가 활약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간단하고 신속하게 정부가 이양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중국 등에서는 그 과정이 복잡해 시간이 걸렸으며, 베트남에서는 거의 30년이 지나서야 실현되었다. 키프로스·케냐·알제리에서는 비공산계의 반군들이 게릴라전을 벌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1959년 쿠바에서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여러 차례의 게릴라전 시도에 실패한 끝에 혁명 활동이 도심지에 집중되는 결과가 생겼다.

그리고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이 계속됨으로써 이 '도시 게릴라전'이 남아메리카에서는 최적의 게릴라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반게릴라전

일체의 게릴라 조직의 수색·고립·섬멸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정규군 사령관들은 아주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동원해왔는데,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러한 것들은 통상적인 전투에 더 적합한 것이다. 게릴라가 숨어 있을 만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 연속 폭격, 사단이나 군단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불과 몇 명의 게릴라를 체포 또는 사살하느라 마을 전체를 쑥밭으로 만드는 '소탕'작전, 고립된 군 초소망의 설치, 대대적인 체포와 검문 등은 하나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민중 봉기가 일어난 것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군사령관이 봉기를 진압하는 데 실패한 것은 정치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특히 공산혁명전투에서는 정치적인 요인이 절대적이다. 공산 게릴라는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즉 인간의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되지 못하면, 한시도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정부는 게릴라가 이러한 지지를 받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게릴라 섬멸전의 기초가 될 정보를 얻기 위해 민중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게릴라 대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여 그들 개개인을 죽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봉기의 배후에 있는 국가 전복을 위한 조직이 분쇄되고 건실한 정치가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정부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봉기의 초기 단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선택적 테러 활동이다. 이 단계에서 저지되지 않으면 봉기는 '무장 투쟁'이라는 제2의 단계로 발전한다. 봉기의 초기 단계에서 정부는 으레 수세를 취하게 된다. 말라야(말레이 반도 남단의 예전 연방)에서는 이 단계에서 정부가 반군이 우위를 점하는 것을 저지하여 확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 연후에 공세로 전환하여 반군의 세력을 분쇄하고 마지막으로 건실하고 자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면서 게릴라 부대들의 잔병을 일소했다.

말레이전의 한 베테랑은 반게릴라전의 성공의 열쇠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열거한다. 첫째, 정부는 뚜렷한 정치적 목표가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목표는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발전적인,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통일된 나라를 이룩하고 유지한다'는 것이다. 둘째, 게릴라들을 수색하고 고립시켜 섬멸함에 있어 정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법에 따라야 하며, 게릴라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전복을 노리는 조직을 분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셋째, 공세 단계에 들어갔을 때 공격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먼저 작전 기지를 잘 선정해야 한다(로버트 톰슨의 〈공산 반란군의 분쇄 Defeating Communist Insurgency〉,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