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로렌스

다른 표기 언어 Thomas Edward Lawrence
요약 테이블
출생 1888. 8. 15, 웨일스 카나번셔 트레마독
사망 1935. 5. 19, 잉글랜드 도싯 클라우즈힐
국적 영국

요약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동지역에서 전설적인 활약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 경험을 회고하여 〈지혜의 일곱 기둥〉을 썼고, 그의 활약을 다룬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군대건축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역사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아랍문제 전문가로 이집트에 가게 되면서 아랍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게릴라 부대를 지휘하면서 아라비아의 독립에 헌신했다. 말년에는 공군항공병으로 일하다가 40세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죽은 뒤인 1935년부터 대중판으로 나온 〈지혜의 일곱 기둥〉은 영어로 된 20세기 작품으로는 드물게 현대의 서사적 인물을 그려낸 책이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게릴라 지휘자
  4. 전쟁 뒤의 활동
  5. 아랍 문제의 고문
  6. 주요작품
  7. 말년
T.E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T.E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개요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동지역에서 전설적인 활약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 경험을 회고하여 〈지혜의 일곱 기둥 The Seven Pillars of Wisdom〉(1926)을 썼다.

초기생애

웨스트미스에서 토머스 채프먼 경과 그의 딸들의 가정교사였던 새라 메이든 사이에 태어났다.

토머스 경은 결혼생활과 아일랜드를 모두 버리고 그녀와 함께 떠났다. 이들은 '로렌스 씨와 그 부인'으로 살면서 5명의 아들(토머스 에드워드는 둘째아들)을 두었고 여느 부부와 다를 것이 없는 결혼생활을 했다. 1896년 가족은 옥스퍼드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로렌스는 고등학교와 지저스 칼리지에 다녔다. 처음에는 중세의 군대건축물에 관심을 가져 1909년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에 있는 십자군 성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연구했는데 1910년 이 분야의 논문을 제출하여 1급 역사학자로 부상했다.

로렌스 기념 상패
로렌스 기념 상패

이 논문은 1936년 〈십자군의 성 Crusader Castles〉으로 사후 출판되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고고학자인 D. G. 호가스의 비호를 받아 모들린 칼리지에서 장학금(연구여행장학금)을 받았으며, 1911~14년 호가스와 레너드 울리 경 밑에서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히타이트인의 거주지 카르케미시를 발굴하는 데 참여했는데, 자유 시간에는 혼자 여행을 하여 그곳 언어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14년초 울리, S. F. 뉴콤 대위와 함께 수에즈의 투르크 국경 동쪽에 해당하는 시나이 북부를 탐사했는데 이는 명목상으로는 팔레스타인 탐사기금의 지원을 받는 학술여행이었으나, 사실상 가자 지방에서 아카바까지의 지도를 만드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명목상의 연구 또한 진정한 학문적 결실을 맺어, 로렌스와 울리가 쓴 〈진의 황야 The Wilderness of Zin〉로 1915년에 출판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런던에 있는 전쟁담당 사무국의 지도과에 민간인으로 고용되어 군사적으로 유용한 시나이 지도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1914년 12월경 육군중위가 되어 카이로로 갔다. 아랍 문제 전문가, 특히 투르크가 지배하는 아랍 지역을 여행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보업무를 담당, 1년 이상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포로들을 면담하거나 지도를 그렸고 적진에 파견된 첩보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조사분석했으며, 투르크군에 대한 안내서를 만들었다. 1915년 중반에 형제인 윌과 프랭크가 프랑스에서 전투 도중 죽자, 로렌스는 치열한 서부전선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무렵 이집트는 중동에서 극히 비효율적인 군사작전의 부대 집결지였는데, 아랍을 여행한 로렌스는 독일과 투르크의 연합군을 비밀리에 공격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후 1916년 10월 외교관 로널드 스토스 경과 함께 아랍에 파견되었는데, 그해 6월 메카의 아미르(amir:지방장관)인 후사인 이븐 알리는 투르크에 맞서 싸울 것을 선언했다. 스토스와 그는 후사인의 아들인 압둘라와 협상했고, 당시 메디나 남서부에서 아랍군을 지휘하던 다른 아들인 파이살과 협상을 진척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1월 카이로에 돌아온 그는 상관들을 설득하여 무기와 금으로 반란을 부추기고 군대본부의 전략에서 독립하려는 야심을 가진 셰이크(Shaykh)들을 이용하도록 했다. 그는 정치장교이자 연락장교가 되어 파이살의 군대에 다시 합류했다.

게릴라 지휘자

로렌스는 단순히 신생 아라비아의 부상에 가담한 장교로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담당하던 아라비아 반도의 작은 지역에서 출발해, 개인의 신용으로 아라비아의 지적 지도자, 조직책, 카이로와의 교섭자, 군사전문가가 되었다.

그가 이끄는 게릴라의 규모는 작았지만 후방에서 투르크를 교란시켰으며, 주로 다리나 공급철로를 파괴하고 여기저기서 아랍군 부대를 출동시켜 다른 곳에 투입될 적군의 병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메디나에 이르는 철로를 차단하여, 강력한 투르크 증원군이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베두인족에게 '아미르 다이너마이트'로 통하게 된 로렌스는, 냉담하고 이기적인 셰이크들을 아라비아 독립이라는 이상에 헌신하도록 만들었고, 베두인족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는 몸소 자기를 징벌하는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북돋우고, 적의 노획물과 영국의 금화를 주어 달랬다(오스만 제국).

2개월간의 행군을 한 뒤 1917년 7월 6일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아카바를 장악하여,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오던 장군 에드먼드 앨런비 경의 부대와 협동하여 아랍 작전을 펼쳤으나 부분적으로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해 11월에 아랍인의 옷을 입고 다라에서 정찰업무를 수행하던 중 투르크군에게 붙잡혔는데, 신분이 탄로나 동성으로부터 야만적인 성폭행을 당한 뒤 탈출했다. 그후 그가 여러 가지로 보고하기도 하고 변조하기도 한 이때의 일은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남겨 그 손상으로부터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다음달 예루살렘의 승전행렬에 참가했고, 그뒤에도 계속 승전을 거두어 파이살의 군대는 북쪽으로 조금씩 진격했으며, 그는 수훈장을 받는 동시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10월 아랍군이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을 무렵, 로렌스는 비록 명성은 얻었으나 육체적·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휴전 직전에 귀향했다.

1918년 10월 30일 왕을 알현했을 때는 바스 훈위와 수훈장을 정중히 사양하여 '손에 선물을 들고 있던' 조지 5세를 놀라게 했다. 1919년 7월 31일에 중령으로 제대했다.

전쟁 뒤의 활동

로렌스는 30세에 대령이 되었다가 34세에 사병이 되었다.

그사이 1919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아라비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아랍 복장을 하고 참석했음) 실패했고, 시리아와 레바논을 아랍 국가들로부터 떼어내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만드는 데 반대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한편 전쟁회고록을 쓰는 데 착수하여, 1919년 11월 옥스퍼드의 올솔스 칼리지로부터 7년간의 연구비를 받았다. 1919년 8월 런던에서 미국 전쟁특파원이었던 로웰 토머스의 '팔레스타인 알렌비와 아라비아 로렌스와 함께'(With Allenby in Palestine and Lawrence in Arabia)라는 강연이 인기를 끌면서 그의 일화가 일반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로렌스 자신도 이 강연에 흥미를 느껴 직접 보러 갔다고 한다.

파리 평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
파리 평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

아랍 문제의 고문

자기 이야기의 3번째 초안을 쓰고 있던 1921년 3월, 로렌스는 당시 식민지 담당관이던 윈스턴 처칠의 부탁으로 아랍 문제의 고문이 되어 다시 중동으로 갔다.

그가 전쟁 때 약속했던 이상주의적 약속들이 일부 이루어져 카이로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자, 공직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전쟁 때 동료였던 공군원수 휴 트렌차드 경의 도움을 비밀리에 받아, 1922년 8월 28일 영국 공군에 가명(존 흄 로스)으로 입대했다. 당시 로렌스는 미사여구를 구사한, 33만 단어에 이르는 〈지혜의 일곱 기둥〉 개정본 8부(2개 칼럼으로 편집)를 〈옥스퍼드 타임스〉에서 인쇄할 계획을 끝마친 상태였다.

또한 회고록 집필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고갈되어 있었다. 그래서 1,200파운드나 받는 식민국의 직책을 기꺼이 포기하고 하루에 2실링 9펜스를 받는 공군 일등병이 되어 직무에 몰입, 자신을 잊는 한편 또다른 책을 쓸 자료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자료를 구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런던 언론이 판버러 기지에 있는 로렌스를 찾아내어 12월 27일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그 사실을 알리자 당황한 영국 공군측은 다음달초에 그를 내보냈다.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다른 일을 찾다가 사막전쟁에 참가했던 육군부의 친구 필립 쳇우드 경의 중재로 1923년 3월 12일 탱크 부대의 사병으로 들어갔다.

이때 T. E. 쇼라는 이름을 썼는데, 자신은 별다른 뜻이 없다고 하나 전쟁후 1922년 조지 버나드 를 만난 것이 로렌스의 삶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7년 그는 이 새 이름을 법적으로 채택했다. 도싯에 있는 보빙턴 캠프에 배치를 받고, 가까이에 있는 클라우즈힐이라는 작은 집을 사서 계속 살았다.

도싯에 있을 때부터 〈지혜의 일곱 기둥〉을 또다른 판으로 출판할 준비를 했는데, 조지 버나드 쇼를 비롯한 친구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두꺼운 옥스퍼드판 책을 줄여 1926년 신청을 받은 128부만을 인쇄했다. 이 책은 화려하게 인쇄·제본되었으며 그가 의뢰한 영국의 유명화가들이 삽화를 그렸다.

주요작품

죽은 뒤인 1935년부터 대중판으로 나온 〈지혜의 일곱 기둥〉은 영어로 된 20세기 작품으로는 드물게 현대의 서사적 인물을 그려낸 책이다.

효과와 '예술성'을 모두 얻으려고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건과 볼거리가 풍부한 행동의 기록이며, 풍부한 인물묘사는 물론 작가 자신의 복잡한 심리적·영적 변화를 드러내주는 진지한 자기관찰로 가득차 있다.

〈지혜의 일곱 기둥〉의 인쇄비를 충당하기 위해 13만 단어로 된 축소판 〈사막의 반역 Revolt in the Desert〉을 대중판으로 만들었다. 1927년 3월 이 책이 나올 때, 로렌스는 비록 이 두 책의 평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도의 기지에 있었으나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첩자로 활동하고 소련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자 영국 공군(1925년 조지 버나드 쇼, 존 부캔, 총리 스탠리 볼드윈의 중재로 공군에 복귀)은 1929년 로렌스를 영국으로 소환했다. 그 사이에 영국 공군의 신병훈련에 대한 반(半)허구적인 회고록 〈The Mint〉(1955 출판)의 초안을 완성했는데, 이 책은 너무 노골적인 나머지 그의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타이프로 쳐서 보낸 것이 전부였다. 책 디자이너인 브루스 로저스의 의뢰를 받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를 영어 산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 1928년 카라치 공군기지에 있을 때부터 1931년 플리머스에 있을 때까지 계속했다.

이 책은 1932년 T.E. 쇼의 작품으로 출판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본명과 가명 모두가 사용되었다.

이상의 책들 외에 생전에 출판된 것은 J. H. 로스라는 가명을 써서 아드리앙 르 코르보의 작품 〈숲의 거인 Forest Giant〉(1924)을 번역한 것이 전부이다. 그밖에 전쟁 때 카이로로 발송한 〈아랍 보고서 Arab Bulletin〉(〈지혜의 일곱 기둥〉에 번안되어 실려 있음)가 〈아라비아에서 온 비밀공문서 Secret Despatches from Arabia〉와 〈동양의 집결 Oriental Assembly〉(A. W. 로렌스가 편집)이라는 문집으로 1939년 사후 출판되었다.

게릴라전에 대한 유명한 수필과 〈지혜의 일곱 기둥〉을 잡지에 연재한 초고를 실은, 전쟁 후 초기 작품이 〈반역의 진전 Evolution of a Revolt〉(1968, S. 웨인트로브와 R. 웨인트로브가 편집)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소수민족 Minorities〉(1971)은 로렌스가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한 100편 이상의 시를 수록한 선집이며, 각각의 시는 그의 일생 동안 일어난 일과 깊고 시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말년

공식적으로는 비행이 금지되었는데도 그는 영국 공군의 수상비행기나 보급선에서 말년을 보냈다.

영국해협에서 북해의 기지까지 옮겨다니고, 공군항공병 쇼(Shaw)라는 낮은 지위에서도 카리스마적으로 행동하면서, 고속수상비행보급선의 디자인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여 여러 차례 엄격한 시험을 거친 뒤 그 사용을 위한 기술안내서 〈200종의 영국 공군 수상비행보급선 The 200 Class Royal Air Force Seaplane Tender〉(1932)을 만들었다. 등사하여 복사한 이 책자는 첫번째 책이 호화로웠던 것에 비해 매우 수수하다.

1935년 2월 26일 영국 공군에서 제대해 40세에 클라우스힐로 은거한 로렌스는, 앞으로의 출판계획에 대한 희망을 갖는 한편, 공허감을 느꼈다.

오랜 친구인 애스터 부인에게 "내 일에 있어 무언가가…… 아마도 내 의지가 깨어진 것 같다"고 자신을 묘사했다. 그해 5월 13일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6일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죽었다.

로렌스는 야심만큼 절망도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자기학대에 가까운 금욕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극단적인 예로 자신의 높은 성취를 거부하려는 충동에서 자아를 상징적으로 죽이기 위해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이름을 택했다. 그러나 여러 방면에 뛰어났던 그는 자신의 희망과는 달리 사생활을 지킬 수 없었고 자신의 신화를 만듦으로써, 현대소설의 어떤 주인공에도 필적할 만한 인물을 몸소 창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