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

멕시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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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혁명은 디아스가 지주와 산업가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자 불만이 커지면서 시작되었다. 디아스가 재선 반대파 마데로를 투옥하고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마데로가 봉기를 호소했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여러 진영에서 혁명군을 조직하여 정부군 요새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1911년 혁명군의 승리로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우에르타가 마데로를 암살하고 전제적 통치를 시행하자 1914년 반란군의 저항으로 우에르타가 망명하고 유혈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
1917년 재집권한 카란사는 개헌을 통해 정부에 토지 몰수 권한을 부여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리를 제한했다. 1920년 철도 노동자의 파업에서 반발이 최정점에 이르러 카란사가 살해됨으로써 혁명은 끝이 났다.

멕시코 혁명(Mexican Revolution)
멕시코 혁명(Mexican Revolution)

혁명은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부유한 지주와 산업가들에게 유리하게 엘리트 중심의 과두정책들을 펼치는 데 대해 불만이 널리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1908년 디아스는 멕시코 정치의 민주화를 환영한다고 말하면서, 7번째 대통령으로 재선되기 위해 1910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할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모순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재선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어 대통령에 입후보하고자 했다. 그러자 디아스는 마데로를 체포해 투옥하고는 그해 6월 부정선거를 치른 뒤 스스로를 당선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난 마데로는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서 '산루이스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 Potosí)을 발표하여 11월 20일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호소했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여러 진영에서 혁명에 대한 기대가 불붙었다. 북부에서는 파스쿠알 오로스코와 판초 비야가 여기저기에서 군대를 끌어모아 정부군 요새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남부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지방의 '카시크'(cacique:농촌지역의 정계 거물)들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이리하여 1911년 봄 마침내 혁명군이 시우다드후아레스를 함락했고, 디아스를 축출하고 마데로를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마데로 정부는 처음부터 불안했다.

사파타는 마데로가 토지를 빼앗긴 인디언들에게 땅을 즉시 되돌려주지 않자 분개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오로스코도 처음에는 마데로를 지지했으나, 느린 개혁에 불만을 느껴 북부에서 혁명운동을 이끌었다. 미국 정부까지도 새 대통령이 반란집단에게 너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우려하고, 멕시코에서 벌어진 내란으로 그곳에서 미국이 지니고 있던 사업적 이익이 위협받고 있는 것을 염려해 마데로에게 등을 돌렸다. 디아스의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가 이끄는 파벌이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지휘하던 멕시코 시 연방군과 부딪쳤을 때 긴장은 최고조에 다달았다.

난투가 벌어지고 그로부터 9일 뒤('비극의 열흘')인 1913년 2월 18일 우에르타와 디아스는 미국 대사인 헨리 레인 윌슨의 집무실에서 만나, 이른바 '대사관저협정'을 맺었다. 그 협정에서 그들은 마데로를 쫓아내고 대신 우에르타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데 동의했다. 우에르타는 다음날 마데로를 체포한 뒤에 대통령에 올랐고, 마데로는 며칠 뒤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에르타가 펼친 광기 어린 전제적 통치에 북부에서 반발이 커졌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과달루페 계획'(Plan de Guadalupe)을 발표해 우에르타의 사임을 요구했다.

사파타는 판초 비야, 알바로 오브레곤과 함께 불안한 동맹을 맺었다. 1914년 봄과 여름에 반란군이 멕시코 시로 집결하자 우에르타는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란사는 비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8월 20일 스스로를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뒤이어 유혈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고, 마침내 비야, 오브레곤, 사파타는 회합을 가진 끝에 비야와 카란사 사이의 대립이 멕시코의 질서를 회복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데 동의하고는 에울랄리오 구티에레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비야는 계속 사파타의 지지를 받아 구티에레스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오브레곤은 다시 카란사와 손을 잡고, 1915년 4월에 셀라야에서 벌어진 혈전에서 비야를 패배시켰다. 그뒤 사파타와 비야는 모두 기반을 잃었고, 비야는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카란사를 뒷받침해준 탓으로 자기가 패배했다고 비난하면서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도시에 있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보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뉴멕시코의 콜럼버스를 습격해 미국인 18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이에 윌슨 대통령이 존 J. 퍼싱 장군에게 멕시코 구릉지대로 들어가 비야를 추적하도록 했으나 그를 체포하지는 못했다.

다시 대통령이 된 카란사는 1917년의 헌법을 제정하는 작업을 이끌었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독재권력을 부여했으며, 정부에게 부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권한을 부여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리를 제한했다. 카란사는 정적(政敵)들을 제거함으로써(사파타는 1919년에 암살당했음) 권력을 지켜나갔으나, 1920년 소노라에서 벌어진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분쇄하려고 했을 때 반발은 최정점에 다달았다.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비롯해 그를 지지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뒤 5월 21일 수도에서 도망쳐 나오려다가 살해되고 말았다. 뒤이어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가 임시대통령이 되었고, 11월에는 오브레곤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1920년에 혁명이 끝을 맺었다고 보지만, 그뒤에도 연방군과 여러 반란세력 사이에 이따금씩 폭력과 마찰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34년에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대통령이 되어, 혁명기에 목표로 했고 1917년 헌법에서 합법화된 개혁들을 '제도화'함으로써 혁명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