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다이

헤라클레이다이

영웅

[ Heraclides ]

요약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의 자식들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정착한 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헤라클레이다이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략 끝에 마침내 펠로폰네소스를 손에 넣은 뒤 이를 삼등분하여 나누어가졌다.
외국어 표기 Ἡρακλεῖδαι(그리스어)
구분 영웅
상징 영웅의 후손
어원 헤라클레스의 자식들
관련 사건, 인물 헤라클레이다이의 펠로폰네소스 정복

헤라클레이다이 인물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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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다이 인물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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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다이는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넓게는 헤라클레스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먼 후손들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여러 여인들에게서 얻은 수많은 자식들 중에서 맏아들 격인 힐로스의 직계 자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힐로스는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헤라클레이다이는 힐로스의 증손자인 테메노스 대(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랜 숙원인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다.

신화 이야기

박해받는 헤라클레스의 자식들

헤라클레스는 아버지 제우스의 뜻에 따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 라코니아, 메세니아 등 광범위한 지역을 다스리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질투한 헤라 여신의 방해로 이 지역의 통치권은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에게로 돌아갔다.

헤라클레스가 죽고 나서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은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박해를 피해 아테네의 테세우스(혹은 그의 자식들)에게 몸을 의탁했다. 아테네인들에게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이를 거절당하자 에우리스테우스는 아테네에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에우리스테우스는 다섯 명의 아들을 모두 잃으면서 패했고, 홀로 도망치다가 스케이로니스 바위에서 헤라클레스의 조카 이올라오스의 창에 최후를 맞았다.

헤라클레이다이의 펠레폰네소스 공략

에우리스테우스를 무찌른 뒤 힐로스와 형제들은 아버지 헤라클레스가 원래 차지하기로 정해져 있었던 펠로폰네소스로 쳐들어가 그곳의 모든 도시들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1년 만에 온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여 신탁에 문의하자 헤라클레스의 자손들이 운명의 신이 정한 시기보다 너무 빨리 펠로폰네소스로 돌아왔기 때문에 신들이 노하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헤라클레이다이는 신들의 뜻을 존중하여 펠로폰네소스를 떠나 테살리아로 갔다.

테살리아의 왕 아이기미오스는 라피다이 족과의 전쟁 때 자신을 도와주었던 헤라클레스의 은혜를 잊지 않고 힐로스를 자신의 의붓아들로 삼고 영토의 삼분의 일을 내주었다. 아이기미오스의 두 아들 팜필로스와 디마스도 자진해서 의붓형 힐로스에게 복종을 맹세하였다. 이렇게 해서 힐로스, 팜필로스, 디마스는 도리스 족의 세 지파를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 헤라클레스의 유산을 계승하기를 원하기 힐로스는 델포이의 신탁을 찾아가 다시 방도를 물었다. 신탁은 “세 번째 결실”을 기다려 “바다 위 골짜기”를 통해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힐로스는 3년을 기다린 뒤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해서 에우리스테우스에 이어 아트레우스가 다스리고 있는 미케네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헤라클레이다이는 다시 크게 패했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힐로스마저 테게아의 왕 에케모스와 결투 끝에 죽고 말았다. 그 뒤 힐로스의 아들 클레오다이오스와 손자 아리스토마코스가 제3차, 제4차 공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헤라클레이다이의 펠레폰네소스 공략

마침내 정복된 펠로폰네소스

아리스토마코스의 세 아들 테메노스, 크레스폰테스, 아리스토데모스는 신탁의 지시대로 했는데도 이렇게 계속 패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신탁에 물었다. 그러자 “세 번째 결실”이란 3년이 아니라 3세대를 뜻하는 것이며 “바다 위 골짜기”는 코린토스 지협이 아니라 리오의 해협을 말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려졌다. 테메노스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왜냐하면 3세대란 바로 자신들의 세대를 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곧바로 로크리스 연안에서 배를 만들어 침공을 준비했다. 헤라클레이다이가 배를 만든 곳은 훗날 나우팍토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배를 건조하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애써 만든 배들은 출항하기도 전에 아폴론의 벼락을 맞고 모두 파괴되었고, 그 와중에서 아리스토데모스도 죽고 말았다. 테메노스는 다시 신탁에 원인을 물었다. 신탁은 헤라클레이다이 중 한 명이 아폴론의 예언자를 살해하였기 때문이라면서 신의 분노를 풀려면 속죄의 제물을 바치고, 살인자를 찾아내어 10년간 추방하고, 눈이 세 개인 사내를 찾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테메노스는 신탁이 지시한 대로 제물을 바치고 살인자를 추방하였지만 눈이 세 개인 사람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뒤 테메노스는 나우팍토스로 돌아가는 길에 말을 타고 가는 애꾸눈의 사내 옥실로스를 만났다. 그는 이 사람이 신탁이 말하는 눈이 세 개인 사내라는 걸 깨달았다. 옥실로스는 엘레이아의 왕이었는데 실수로 살인을 저질러 1년 동안 추방당한 상태라고 했다. 그는 다시 자신의 나라 엘레이아로 돌아가게 해주는 조건으로 길안내의 요청을 수락했다.

부서진 배들을 수리한 헤라클레이다이는 옥실로스의 안내를 받으며 리오의 해협을 통과해서 다시 펠로폰네소스로 쳐들어갔고, 펠로폰네소스의 패권자인 티사메노스 왕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영토를 손에 넣었다. 티사메노스는 트로이의 영웅 아가멤논의 아들인 오레스테스의 아들이었다.

영토의 삼등분

헤라클레이다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비뽑기를 통해 삼등분하여 나누어가졌다. 그 결과 아르고스는 테메노스에게로 돌아갔고, 라코니아는 죽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쌍둥이 아들 프로클레스와 에우리스테네스가, 메세니아는 크레스폰테스가 각각 차지하였다. 엘레이아는 약속대로 옥실로스 왕의 몫으로 주어졌고, 아르카디아는 그들이 정복 전쟁에 나설 때 “함께 음식을 나눠먹은 자들”은 그대로 놔두라는 신탁의 지시에 따라 정복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아르카디아의 왕 킵셀로스는 헤라클레이다이가 펠로폰네소스로 쳐들어올 때 사신을 보내 선물을 바쳤는데, 이때 사신들이 헤라클레이다이의 군사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설에 따르면 킵셀로스가 아르카디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크레스폰테스에게 자신의 딸 메로페를 내준 덕분이라고 한다.

신화 해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기원전 1000년경에 도리스 족의 침략을 받아 정복되었다. 도리스인들은 외지인인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 지역의 헤라클레스 숭배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복은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귀환’이라는 식으로 침략을 정당화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도리스인들의 침략은 빠르게 이루어진 격변의 형태가 아니라 작은 단위의 부족들이 천천히 그리고 무계획적으로 이 지역에 스며들듯 정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다이의 신화가 도리스인들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해석은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 힘들다.

참고자료

  • 핀다로스, 『피티아 찬가』
  • 헤로도토스, 『역사』
  •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 아폴로도로스, 『비블리오테케』
  • 파우사니아스, 『그리스 안내』
  •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역사 총서』
  • 피에르 그리말, 『』, 열린책들
  • W. H. Roscher, 『Ausführliches Lexikon der griechischen und römischen Mytholog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