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고이왕

분류 문학 > 인물 > 왕

기본정보

백제 제8대 왕
생몰년: ?-286
재위기간: 234-286

일반정보

백제의 제8대 왕으로 제4대 개루왕(蓋婁王)의 둘째 아들이다. 제6대 구수왕(仇首王)이 재위 21년 만에 죽고 구수왕의 맏아들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였으나 폐위되자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자 제5대 초고왕(肖古王)의 동생인 고이왕(古爾王)가 즉위하였다. 234년부터 286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재위 53년 만에 죽자 책계왕(責稽王)이 왕위를 이었다.

전문정보

백제의 제8대 왕으로 제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1 고이왕 즉위년조에 “구수왕이 재위 21년만에 죽고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으므로, 초고왕의 모제(母弟)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仇首王在位二十一年薨 長子沙伴嗣位 而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卽位)”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권2 기이 2 남부여전백제조에는 “사비왕은[또는 사이왕이라고도 한다] 구수가 죽자 왕위를 이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으므로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혹은 악초(樂初) 2년 기미에 사비왕이 죽고 고이가 즉위하였다.(又沙沸王 [一作沙伊王] 仇首崩 嗣位 而幼少不能政 卽?而立古爾王 或云至樂初二年己未乃崩 古爾方立 )”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사반왕의 사망 시기가 악초(樂初) 2년 기미라 하였지만, 기미년은 경초(景初) 3년(239)이므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이왕 6년에 해당된다. 즉, 구수왕이 죽은 뒤 사반왕이 즉위하여 5년간 재위하다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고이왕의 즉위는, 『삼국사기』백제본기가 초기부터 부자(父子)상속, 그것도 장자(長子)상속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 가운데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즉위년조에 “개루의 2자(二子)”로 기록되어 있는 점은 고이왕의 정변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김기섭,2000)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초고왕의 동복동생이라 하였고,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고이왕조에는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이왕(234-286)이 개루왕(128-166)의 아들이라면, 개루왕이 죽은 해인 166년에 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즉위시의 나이는 68세이며, 53년간 재위하다가 120세에 죽은 것이 된다. 또한 그가 왕위에 오르는 시점의 나이는 최소한 68세 이상이 되는데 왕 3년에 서해의 큰 섬에 전렵을 나가 사슴 40마리를 잡았다고 하는 등 그의 생몰년대와 재위시의 활동을 관련시켜 볼 때, 일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김철준, 1982) 따라서 고이왕이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계보상의 의제일 뿐 신빙성이 없으며, 계보상 구수왕과 연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이기동, 1982)

이에 대하여, 고이왕이 초고왕의 모제(母弟)라는 것은 동모제(同母弟)라기 보다는 모(母)의 제(弟)로 해석되며, 이러한 경우 부여씨 왕계가 아닌 별개세력의 등장으로 보아 왕실교체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있다.(천관우, 1989)

고이왕은 즉위 후에 왕권의 강화와 체제정비를 꾸준히 추진하여 백제의 국가적 기반을 마련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고이왕의 등장과 함께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크게 변모된 모습을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지배체제의 골격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여 3차례에 걸쳐서 제천사지(祭天祀地)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고 제의체계의 정비를 통한 집권력의 강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13년(246)조에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帶方太守) 왕준(王遵)이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빼앗았다. 낙랑태수 유무가 소식을 듣고 노하자 왕이 침략 받을까 두려워 주민을 돌려주었다.(魏幽州刺史毋丘儉與樂浪太守劉茂 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 王乘虛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고 한다. 이 기사는 『삼국지』위서 동이전30 한(韓)조에 전하는 이른바 기리영전투 기사와 관련하여 주목받았다. 즉,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韓)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고 한다.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백제국 혹은 목지국(노중국, 1988), 신분고국(윤용구, 1998)으로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의 분노를 격발시켰던 신지를 곧 백제의 고이왕으로 보고 전투를 주도했을 것으로 보았다.(이병도, 1976; 천관우, 1989; 이기동,1996)

『삼국사기』권2 백제본기2 고이왕 27년(260) 6좌평, 16품의 관등을 제정하였으며, 품계에 따라 관인들의 복색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고이왕 28년(261)에는 국왕이 자주색의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푸른 비단바지를 입고서 금화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을 썼으며, 흰 가죽 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은 모습으로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보았다고 한다. 고이왕 29년(262)에는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도둑질을 한 자는 물건 값의 3배를 배상하고 종신금고에 처하는 형벌을 부과했다고 한다.

고이왕 27년(270) 체제정비 기사에 관하여, 이를 취신하여 이때에 6좌평 16관등제가 정비되어 전제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이종욱, 1978)와 이 기사는 『주서』와 『구당서』가 기록하고 있는 사비시대의 사실이 소급 부회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노중국, 1988) 또한 4-5세기에 6좌평제가 형성되고 6세기 후반 북주(北周)의 영향을 받아 22부사제(部司制)가 갖추어지면서 백제의 중앙관료기구가 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鬼頭淸明, 1978) 따라서 고이왕 27~29년에 단행된 체제 정비기사는 내용을 그대로 취신하기는 어렵지만, 고이왕대에 일괄 기재되고 있는 점은 백제사에서 고이왕 대가 앞선 시기와는 뚜렷이 구분되며, 국가체제의 기본골격이 마련되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노중국, 1988)

한편, 고이왕을 『주서(周書)』『수서(隋書)』백제전(百濟傳)과 『한원(翰苑)』백제전(百濟條) 소인(所引) 『괄지지(括地志)』에 보이는 구태(仇台)와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구태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세운 것이 백제인데, 이 구태와 고이는 자음(字音)상으로 구(仇, Ku)와 고(古, Ko,Ku)는 동음(同音)이요, 태(台)의 동음은 이(以, i)로서 이와 같다는 것이다.(이병도, 1976) 그러나 위구태(尉仇台) ?우태(優台)? 부태(夫台) 호태(好台)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여 계통의 인명이나 관직명에 많이 붙는 태(台)는 i보다는 chi, ti로 읽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이홍직, 1971)

참고문헌

이홍직, 1971, 『韓國古代史의 硏究』, 신구문화사.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이종욱, 1978, 「百濟의 佐平」『震檀學報』45.
鬼頭淸明, 1978, 「日本律令官制の成立と百濟の官制」『日本古代の社會と經濟(上)』, 吉川弘文官.
김철준, 1982,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노중국, 1988, 『百濟史硏究』, 일조각.
천관우, 1989, 『古朝鮮史 ? 三韓史硏究』, 일조각.
이기동, 1996, 『百濟史硏究』, 일조각.
이기백, 1996,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윤용구, 1998, 「『삼국지』한전 대외관계기사에 대한 일검토」『마한사연구』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八 古爾王 [肖<古>之母弟 甲寅立 理五十二年]
제8 고이왕 [초고의 동복아우이다. 갑인년에 즉위하여 52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