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역사

한의 역사

한왕조의 창시자는 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하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나라의 봉국(封國)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의 씨족적 결합을 기초로 한 읍(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제후왕은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제를 가지며, 한대(漢代) 초기에는 자립적 경향이 있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제후왕의 봉토삭감정책이 취해져, BC 154년에 일어난 오초 7국(吳楚七國)의 난 후에 경제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으며, 무제(武帝) 때 제후왕은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히 잃어 군국제는 내용면에서는 군현제와 똑같은 것이 되어,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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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평준법(均輸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의 황제는 어려서 즉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하였으므로, 또다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골 있는 관료나 학자의 일파가 환관의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다. 그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그 후 궁정정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후한왕조는 소농층(小農層)의 몰락, 호족세력의 발전 등의 사회적·정치적 과제에 대처하는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호족은 전한시대부터 사회적 세력을 확대하고, 후한의 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한은 호족의 정권참가로써 지탱되고 있었다. 유교 국교화의 강화도 호족층이 자체결합의 근거를 유교에 구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효렴(孝廉) 등의 관리임용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에의 길을 확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소유지를 확대하여 소농층을 지배하에 편입하였다. 그 결과 황제통치의 기반인 농민층은 축소되고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감퇴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