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동탁

[ 董卓 ]

요약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
출생-사망 139 ~ 192
중영
국적 중국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중국 린타오
시대 후한

자(字)는 중영(仲穎)이며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 지금의 甘肅省 岷縣) 출신이다. 소제(少帝)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한 뒤에 공포정치를 행해 후한(後漢)의 멸망을 가속화하였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탁전(董卓傳)’에 따르면, 동탁은 젊은 시절에 유협(遊俠)을 숭상하여 강족(羌族)이 사는 곳을 방랑하며 그들과 사귀었다.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강족의 우두머리들이 찾아오자 농사짓던 소를 잡아서 대접했고, 동탁의 후한 대접을 감사하게 여긴 강족은 그에게 1,000마리의 가축을 주었다.

환제(桓帝) 말년에 농서 등 6개 군(郡)에서 양가(良家)의 자제를 선발하여 우림랑(羽林郎)으로 임명했는데, 동탁은 재능이 있고 무예가 뛰어나 이에 선발되었다. 그리고 사마(司馬)로 임명되어 중랑장(中郎將) 장환(張奐)이 병주(幷州)의 강족을 토벌할 때에 공을 세워 낭중(郎中)으로 승진했다. 당시 그는 포상으로 받은 비단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동탁은 그 뒤 광무령(廣武令), 촉군북부도위(蜀郡北部都尉),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병주자사(幷州刺史), 하동태수(河東太守) 등을 지냈으며, 184년에는 중랑장(中郎將)으로 임명되어 황건군(黄巾軍)의 토벌에 나섰다. 전투에서 패해 파직되었으나 그해 겨울 양주(涼州)에서 한수(韓遂)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당시 농서로 갔던 토벌군 가운데 동탁의 부대만 무사히 귀환하여 동탁은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되고 태향후(斄鄉侯)로 봉해졌으며 병주목(幷州牧)을 겸하게 되었다.

189년 영제(靈帝)가 죽고 그의 장남인 소제(少帝) 유변(劉辯)이 즉위하자,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은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리는 환관들을 없애기 위해 몰래 각지의 장수들에게 낙양(洛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살해되었고, 환관인 단규(段珪) 등은 소제와 그의 동생인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을 인질로 붙잡고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동탁은 군대를 이끌고 북망(北芒)에서 소제와 진류왕을 구출하여 낙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하진의 부대를 흡수하고, 여포(呂布)를 시켜 정원(丁原)을 죽인 뒤에 그의 군대도 병합하여 낙양의 군사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그 뒤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는 태위(太尉)가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켜 홍농왕(弘農王)으로 삼고, 9살인 진류왕 유협을 왕위에 앉혔다. 헌제(獻帝)를 옹립한 뒤에 동탁은 미후(郿侯)로 봉해졌으며, 상국(相国)이 되어 전횡을 부렸다. 그는 황제를 만날 때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궁 안에 들어갔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지양군(池陽君)으로 봉해 군주와 마찬가지로 가신(家臣)을 둘 수 있게 했다.

190년 동탁은 수도를 낙양에서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고, 태사(太師)의 자리에 올라 상보(尙父)라고 불렸다. 그는 황제가 타는 수레를 탔으며, 동생인 동민(董旻)을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하고 호후(鄠侯)로 봉했다. 그리고 조카인 동황(董璜)은 시중(侍中)과 중군교위(中軍校尉)로 임명해 군을 이끌게 했다. 또한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동탁오수전(董卓五銖錢)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동전을 만들어 화폐 유통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동탁은 192년 부하 장수인 여포에게 살해되었다. 여포는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상서복야(尚書僕射) 사손서(士孫瑞)와 함께 동탁의 암살을 모의하여, 동탁이 헌제를 만나기 위해 미앙전(未央殿)에 왔을 때 기도위(騎都尉) 이숙(李肅) 등을 시켜 동탁을 습격하게 하여 그를 죽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동탁에 대해 “탐욕스럽고 모질고 잔인하여 포학하고 어질지 않았으니 글자로 나타낸 뒤로 이러한 자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동탁은 성격이 잔인해 가혹한 형벌로 사람들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보복했다고 한다. ≪삼국지≫에는 동탁이 관리들을 모두 모아놓은 자리에서 북지군(北地郡)의 항복한 포로 수백 명을 끌고 와서는 그들의 혀와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아 큰 가마솥에 삶게 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도 동탁은 태연하게 계속해서 술과 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역참조항목

원술, 공손탁, 정원, 장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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