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

유방

[ 劉邦 ]

요약 중국 한(漢)나라의 제1대 황제(재위 BC 202∼BC 195). 진나라 말기에 군사를 일으켜 진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시켰다.
출생-사망 BC 247 ? ~ BC 195
국적/왕조 중국 한(漢)
재위기간 BC 202년∼BC 195년
별칭 자 계(季), 묘호(廟號) 태조(太祖)
활동분야 정치

자는 계(季)이고, 묘호(廟號)는 원래 태조(太祖)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고조(高祖)라 칭한 뒤로 이것이 통칭이 되었다.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펑현[豊縣]에 해당하는 패(沛) 땅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업을 돌보지 않고 유협(遊俠)의 무리와 어울렸다. 장년에 이르러 하급관리인 사수정장(泗水亭長)이 되었으며, 당시 여산(驪山)의 황제릉(皇帝陵) 조영 공사에 부역하는 인부의 호송책임을 맡았다. 호송 도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여 임무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머지 인부를 해산시키고 자신도 도망하여 산중에 은거하였다.

진(秦)나라 말기에 이르러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였으며, 유방도 향리의 지도자와 청년층의 추대를 받아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일으켜 패공(沛公)이라 칭하였다(BC 209). 이듬해 북상하여 항량(項梁) ·항우(項羽)의 군대과 만나 연합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뒤 항우의 군대가 동쪽에서 진군(秦軍)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 그는 남쪽으로 관중(關中)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여 항우보다 앞서 수도 셴양[咸陽]을 함락시키고, 진왕(秦王)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 또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을 폐지하고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하여 인심을 수습하였다.

약 1개월 늦게 셴양에 도착한 항우가 유방을 살해할 목적으로 이른바 '홍문(鴻門)의 회(會)'에 불려가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부하인 장량(張良)과 번쾌(樊噲)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였고, BC 206년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그뒤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소하(蕭何)·조참(曹參)·장량(張良)·한신(韓信) 등 유능한 신하와 장수들의 보좌를 받아 마침내 해하(垓下)의 결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중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에 오르고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정하였다.

한나라 개국에 공이 큰 장수와 부하를 제후왕(諸侯王)과 열후(列侯)로 각지에 봉(封)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이들은 모두 제거되거나 쇠망하고 왕실일족(王室一族) 출신으로 대체되어, 제후왕은 한실일족(漢室一族)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불문율이 성립하였다. 유방은 서민 출신이었으나 성격이 대담하고 치밀하며 포용력이 있어, 부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데 능숙하였으므로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