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

진승

[ 陳勝 ]

요약 중국 진(秦)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로서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장초(張楚)’를 건국하였다.
출생-사망 ? ~ BC 208
국적 중국 진(秦)
활동분야 농민 반란
출생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덩펑[登封]

중국 진(秦)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로서 자(字)는 섭(渉)이고, 양성(陽城, 지금의 河南省 登封) 사람이다. (漢)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은왕(隠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진승(陳勝)은 가난한 고농(雇農) 출신으로 자기 땅이 없어서 남에게 고용되어 농사를 지었지만, 젊어서부터 남달리 포부(抱負)가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농장에서 일하다가 진승이 나중에 부귀(富貴)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모두 비웃었다. 그러자 진승은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가 어찌 홍곡(鴻鵠,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느냐(燕雀安知 鴻鵠之志哉)”며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원전 210년 진(秦)의 (始皇帝, BC 259~BC 210)가 죽고 막내아들 호해(胡亥, BC 221 ~BC 207)가 2세황제(二世皇帝)로 즉하였으나, 조고(趙高)의 전횡(專橫)으로 백성들은 더욱 도탄(塗炭)에 빠졌다. 기원전 209년 7월, 2세황제는 장성(長城) 건설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위해 과역(課役)이 면제되었던 빈민(貧民)까지 징발(徵發)하였고, 진승(陳勝)도 징발되어 둔장(屯長)으로서 900명의 일행과 함께 어양(漁陽, 지금의 北京市 密雲)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일행이 기현(蘄縣) 대택향(大澤鄉, 지금의 安徽省 宿州市 宿縣)에 이르렀을 때 큰 비를 만나 정해진 기한 안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진(秦)은 법(法)으로 기한을 어기는 사람들을 (斬刑)에 처하도록 정해 놓고 있어서, 진승(陳勝)은 오광(吳廣)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진승(陳勝)은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진승(陳勝)은 ‘대초(大楚)’의 장군(將軍)임을 자처하며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다. 진(秦)의 폭정(暴政)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으므로 농민군의 세력은 매우 빨리 확대되었다. 과거 위(魏)의 명신(名臣)으로 이름이 높던 장이(張耳, ?~BC 202)와 진여(陳余, ?~BC 205) 등 진(秦)에 반기를 든 세력들도 잇달아 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진승은 과거 초(楚) 말기의 도읍이었던 진성(陳城, 지금의 河南省 淮陽)을 점령한 뒤에 왕위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였다. 그리고 진(秦)의 도읍인 셴양[咸陽] 공격에 나서, 오광(吳廣)은 형양(滎陽, 지금의 河南省 滎陽)으로, 주문(周文, 周章이라고도 한다)은 한구관[函谷關]으로 진격(進擊)케 하였다. 또한 무신(武臣)과 장이(張耳), 진여(陳余)는 옛 조(趙)의 땅을, 주시(周市)는 위(魏)의 땅을 공격하도록 파견하였다. 진승(陳勝)의 반란군이 위세를 떨치자, 각지에서 유방(劉邦), 전담(田儋), 항량(項梁), 항우(項羽) 등의 군웅(群雄)이 봉기(蜂起)하였다.

하지만 각지에 파견된 장수들이 과거 6국의 귀족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하면서 농민군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조(趙)로 파견된 무신(武臣)은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었으며, 위(魏)로 파견된 주시(周市)는 영릉군(寧陵君)을 옹립하여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6국의 귀족들도 잇달아 할거(割據)하며 왕으로 자처했다. 주문(周文)이 이끈 농민군은 한구관[函谷關]을 넘어 셴양[咸陽] 인근의 희(戲, 지금의 陝西 臨潼) 지역까지 진출하였지만, 장한(章邯)의 진군(秦軍)에게 패하여 조양(曹陽, 지금의 河南 靈寶)으로 퇴각하였다. 주문(周文)은 이 곳에서 3달 동안 진군(秦軍)과 맞섰지만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패배하였고, 결국 [河南省] 몐츠[澠池]에서 자살하였다. 형양(滎陽) 공격에 나선 오광(吳廣)도 여러 달 동안 포위하여 공격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오광(吳廣)이 부장(部將)인 전장(田臧)과 이귀(李歸) 등에게 살해되면서 농민군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결국 장한(章邯)의 군대에 괴멸(壞滅)되었다.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의 지원을 받아 장초(張楚)의 도읍인 진성(陳城)을 공격했고, 진승(陳勝)은 패하여 진성(陳城)을 벗어나 성보(城父, 지금의 安徽省 渦陽)로 물러났다. 이 곳에서 진승(陳勝)은 마부(馬夫)인 장고(荘賈)에게 살해되었다.

참조항목

, , , , , , , , ,

역참조항목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