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후

여후

[ 呂后 ]

요약 중국 전한(前漢)의 시조 유방(劉邦:高祖)의 황후.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고 여씨 일족을 고위고관에 등용시켜 여씨정권을 수립하였으며 동생을 후황으로 책봉하여 유씨 옹호파의 반발을 불렀다.
출생-사망 ? ~ BC 180
아후
본명
국적 중국 전한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산양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부인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단현(單縣)에서 출생하였다. 성 여(呂)씨이고 자는 아후(娥姁), 이름은 치(雉)이다. 부친 여공(呂公)은 패현에서 유방과 친분을 맺었으며 그 인연으로 유방을 알게되었다. 당시 말단 관직에 무명의 유방과 결혼하여 중국 천하를 통일하는 평정사업(平定事業)을 도왔고,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내조하였다. 여후는 한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던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같은 명신(名臣)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여후의 이런 계략이 한나라가 안정적인 통치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유방이 한고조가 되어 12년 만에 죽자 어린 아들 혜제(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은 자신이 잡았다. 실권을 잡자 한고조가 총해했던 후궁 척희(戚姬)를 죽였고 아들인 유여의(劉如意)도 독약을 먹여죽였다.  혜제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혜제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키면서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였는데, 자신의 친족인 여씨 일족을 고위고관에 등용시켜 사실상의 여씨정권을 수립하였다.

여후는 유방의 총비(寵妃) 척부인(戚夫人)의 수족을 자르고 변소에 가두는 등 횡포를 자행하였는데 이런 여후의 행동으로 폭정을 행한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유씨(劉氏)만을 후왕(侯王)으로 책봉하라는 유방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동생 여산(呂産), 여록(呂祿)을 후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이것이 유씨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여후가 죽자 곧 여씨 주멸(誅滅)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여씨의 난(실제는 미수에 그쳤다)이며, 여씨 정권은 붕괴하고 고조의 차남 유항(劉恒)이 즉위하여 문제(文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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