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어국문학

조선의 국어국문학

조선의 국어 ·국문학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계기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녔으나 조선 초까지 우리의 고유한 문자를 갖지 못하고 한자(漢字)를 써오다가 훈민정음의 창제로 비로소 독립적인 문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우리 고유의 언어에 알맞으며, 자유로이 생각하는 바를 적을 수 있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창제하기 위하여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1443년 28자의 표음문자(表音文字)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새 문자의 시험을 위하여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첫 시도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보고, 창제한 지 3년 후 반포하였다. 그 후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天江之曲)》이 지어졌고, 이어 《동국정운》을 간행, 훈민정음을 가지고 당시의 어지럽던 한자음(漢字音)을 본바탕에 따라 바로잡아 놓았다. 이후 훈민정음은 광범하게 이용되고 이에 따라 국어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세조 때에는 많은 불경을 언해(諺解)하여 훈민정음 보급에 힘썼다.

성종 때 지은 《내훈(內訓)》은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중종 때에는 최세진(崔世珍)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간행하고, 후기에 이르러 실학사상에 입각한 주체의식이 고양되면서 국어학의 연구도 활기를 띠었다. 신경준(申景濬)은 음운연구에, 유희(柳僖)는 한글의 음리(音理) ·음가(音價)를 밝힘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 밖에 이성지(李成之) ·이의봉(李義鳳) ·정약용(丁若鏞) 등이 한글의 어휘를 수집하는 데 힘썼다.

국어학 연구는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민족의식이 싹틈에 따라 새로이 진전되었다. 정부에서는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립, 주시경(周時經) ·최광옥(崔光玉)으로 하여금 국어를 정리토록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국어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시조와 가사문학 등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문학의 새로운 발달을 가져왔다. 우선,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서사시는 민족문학사에 있어 획기적 디딤돌이 되었다.

시조문학은 초기부터 발달, 김종서 ·남이(南怡)의 작품은 패기와 자신에 넘쳤고, 길재(吉再) ·원천석(元天錫) 등의 시조는 유교적 충절을 읊고 있다. 16세기에는 특히 시조가 발달하였는데, 황진이(黃眞伊)의 시조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을 꾸밈없이 노래하였고, 윤선도(尹善道)는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은둔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18세기의 시조작가인 김천택(金天澤)과 김수장(金壽長)은 역대 시조와 가사를 모아 《청구영언(靑丘永言)》과 《해동가요(海東歌謠)》를 각각 편찬하였다.

가사문학의 선구자는 정극인(丁克仁)이며, 그의 작품 《상춘곡(賞春曲)》은 가치가 높다. 가사문학의 대표적 작가는 16세기의 정철(鄭澈)인데, 그는 풍부한 우리말의 어휘를 마음껏 구사하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 후 박인로(朴仁老) ·김인겸(金仁謙) 등이 이름을 떨쳤다.

국문학은 조선 후기에 특히 발달하였는데, 한글 소설의 보급은 국문학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다. 허균(許筠)은 최초로 한글소설을 지었는데, 당시 사회비판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홍길동전(洪吉童傳)》은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소설로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가 유명하고, 군담소설로서 《임진록(壬辰錄)》 《임경업전(林慶業傳)》 등이 널리 읽혔다. 18세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작자 미상의 《춘향전》은 고대소설의 대표작품으로 인간평등의 사회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애정소설이다.

그 밖에 교훈적이고 사회풍자적인 《심청전》 《흥부전》 《장끼전》 《두꺼비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등 작품이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이후로는 잡가(雜歌)와 판소리가 국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잡가로는 타령 ·육자배기 ·사랑가 ·수심가 등이 애창되었고, 판소리로는 춘향가 ·심청가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개화기에 이르자 고대문학은 신문학으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