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신라

상대의 신라

신라의 모체는 진한 12개 성읍국(城邑國)의 하나인 사로(斯盧:慶州 ·月城)였는데, 사로국은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及梁),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沙梁),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本彼),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漸梁),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漢祗),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등 6개촌과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해서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BC 57년이 건국연대로 되어 있으나 사로국이 성립된 것은 이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곁에 있던 알[卵] 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자 6부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君長),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즉위 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았는데, 알영은 사량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조의 난생설화는 신라의 건국설화라기보다는 6부족의 연맹체인 사로국의 전설로 짐작되고 있다. 사로국을 모체로 하였던 초기의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 중에서 왕을 추대하고 이들이 주체가 되어 6부족의 연맹체를 이끌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륙과 멀리 떨어진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간헐적으로 경주분지에 정착한 유리민(流離民) 집단의 이질적 요소 등으로 3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발전하였다.

4세기에 들어 내물왕이 거서간(居西干:제사장)·차차웅(次次雄:무당)·이사금(尼師今:계승자)으로 변천한 왕호를 마립간(麻立干:통치자)으로 개칭하고, 3성 중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고대국가의 실질적 시조로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77년, 광개토왕이 국위를 떨치고 있던 고구려와 국교를 맺고, 볼모를 보내어 화친정책을 썼으며, 377년과 382년에는 고구려의 알선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에 사신(使臣)을 보냈다.

또한 내물왕은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괴롭히자 399년 고구려에서 5만의 원병을 얻어 백제군과 합세하여 왜구(倭寇)를 무찔렀다. 눌지왕 때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 등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자 그 대비책으로 백제와 나제공수동맹(羅濟共守同盟)을 맺었고, 왕권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다.

20대 자비왕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경주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였고(469), 소지왕은 지방의 귀족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한편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市肆]을 열어 물화(物貨)의 원활한 유통을 꾀하는 등 서정쇄신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양국의 관계를 더욱 굳게 하였다(493).

지증왕 때에는 왕권강화와 내물왕계의 혈족결합을 전제로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통치자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개칭하였고, 지방에 주·군·현(州郡縣)과 2소경(小京)을 두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어 실직주(悉直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신라영토에 편입시켰다(512).

왕권의 안정기에 들어간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을 공포하고(520),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528), 불교를 공인하고,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법흥왕 23년을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으며(536), 병부상대등 등 새로운 관제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이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대가야국(大伽倻國:高靈地方)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회유하였으며, 524년에는 왕 자신이 남쪽의 경계를 순시하여 국경을 개척하였고, 532년에는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어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에서 고현(高峴:鐵嶺) 이남에 이르는 고구려 10군(郡)을 점령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553) 한강 유역의 백제영토를 전부 차지하여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신주(新州:漢山州)를 두었으며, 이로써 120년간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은 깨어졌다.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에도 손을 뻗쳐 562년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어 합천(陜川)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상대의 신라 본문 이미지 1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황초령진흥왕순수비고구려단양 신라적성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백제진흥왕진흥왕진흥왕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동북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안변(安邊)에 비열흘주(比列忽州)를 설치(556)하고 이원(利原)의 마운령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단양의 적성비(赤城碑)와 창녕 ·북한산 ·황초령(黃草嶺) ·마운령에 세워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웅변하여 주고 있다. 이후 당항성(黨項城:南陽灣)을 거점으로 하여 중국(陳 ·北齊) 통로의 관문으로 삼았다.

이어 진평왕은 관제의 정비에 힘써 위화부(位和府) ·조부(調府) ·예부(禮府) ·승부(乘府) 등을 신설하여 관부를 직능별로 조직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隋) ·당(唐)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선덕여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본격화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 ·당(羅唐) 통로의 거점인 당항성도 크게 위협을 받았고, 백제는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서부국경은 경산(慶山)까지 후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압독주(押督州:慶山)의 군주로 삼아 대처하였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적극화하여 당에 유학생 ·유학승도 보냈다.

647년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의 반란을 진압한 뒤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김춘추 ·김유신 일파는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중앙 관제를 정비 개편하여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하고 좌·우 이방부(左右理方部)를 설치하는 한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인 상대등을 상징적인 위치로 바꾸고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侍中)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귀족층에 의한 관직독점이 배제되는 등 권력구조에 변혁이 일어나 귀족연합정치가 무너지고 전제왕권이 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