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엔트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

[ Council of Trient ]

요약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의 트리엔트(지금의 Trento)에서 개최된 종교회의로서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따른 교회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소집되었지만 실질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517년 루터(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 개최 요구가 꾸준히 나타났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Karl V, 1500~1558)도 1524년부터 꾸준히 교황에게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교황인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1478~1534)는 교황권이 공의회의 권위 아래 놓일 것을 두려워하여 공의회 소집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534년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Paulus III, 1468~1549)는 교회 기구들을 해치고 있는 해악들을 조사할 '교회개혁추기경회의'를 창설하는 등 프로테스탄트의 위협에 맞서 가톨릭의 내부 개혁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1545년 3월 15일 카를 5세의 공의회 소집 요구에 동의하였다.

공의회는 1545년 12월 13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현 Trento)에서 열렸다. 두 차례 논의가 중단되어 바오로 3세 때의 제1기(1545~1547), 율리오 3세(Julius III, 재위 1550~1555) 때 속개된 제2기(1551-1552), 비오 4세(Pius IV, 재위 1560~1565) 때의 제3기(1562-1563)로 구분된다. 공의회에서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제기하였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가톨릭의 교리를 정의하였으며, 교회의 규율과 제도 개혁을 결정했다. 교황 비오 4세는 1564년 1월 26일 공의회에서 결정한 내용들을 승인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하였으며, 11월 3일 '트리엔트 신앙고백'이라는 교리요약집을 만들어 주교들에게 배포하였다.

프로테스탄트는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음을 내세워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믿음으로만 면죄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가지 성사(sacrament)만을 받아들였다. 또한 신이 미리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부여한다는 예정설을 강조하고, 성모와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루터의 주장을 배격하고 그가 번역한 성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a)를 공식적인 성서로 선포했으며, 성서와 성전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했다. 아울러 성서의 해석은 교회만이 권위를 가짐을 명백히 하여 교황의 권위와 성직계서제를 재확인했다.

또한 예정설과 믿음에 의한 면죄설을 배격하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더불어 선행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면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지며 그 은총은 성사를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온다고 하여, 성사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을 일반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했다. 7성사가 불가결한 것으로 존속되었으며, 성인의 통공,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 설립, 주교 임명, 강론 등에 대한 교령도 반포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복음서의 진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주교의 권위 하에서 행해져야 했으며, 주교와 사제는 그들 각각의 주교관구와 교구 안에 거주해야만 했다. 나아가 성직자들은 엄격히 선발되어 주교관구와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는 예딘(H. Jedin)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가 제기한 문제와 관련해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하여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내부 개혁을 추진하는 기초를 놓았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로욜라(Loyola, 1491~1556)가 결성한 예수회의 확장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의 진출을 막으며 가톨릭 신앙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의 성과는 거두었지만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리와 믿음이 뚜렷하게 구별되었으며, 표면적으로나마 중세유럽에 동질성을 부여하였던 기독교적 보편성은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