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5세

비오 5세

[ Pius Ⅴ ]

요약 교황(재위 1566~1572).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전례서를 개혁하였다. 또한 튀르키예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 에스파냐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에서 튀르키예를 물리치자 이 날을 축일로 선포하였다.
출생-사망 1504.1.17 ~ 1572.5.1
국적/왕조 이탈리아
재위기간 1566년 ~ 1572년
본명 안토니오 기슬리에리(Antonio Ghislieri)
별칭 세례명 미카엘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밀라노 보스코

밀라노 근처 보스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양을 치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 때 보게라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하여 1521년 5월 18일 수도 서원을 하였다. 볼로냐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 제노바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파비아에서 16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였다.

1551년에 로마 종교재판소의 수석 대표로 임명되었고, 1556년에는 네피와 수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557년에 추기경으로, 1558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 대종교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이후로는 바르나바회의 후원자로서 그리고 몬도비의 주교로서도 활동하였다.

1565년 12월 19일부터 1566년 1월 7일까지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자신의 교황명을 비오 5세로 정하였다. 모든 영역에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하였으며, 교황이 된 후에도 수도자의 절제된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았다.

교황 비오 5세가 교회 개혁에 있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전례서의 개혁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1566년에 《교리서》를 출판하였고, 1568년에는 개정된 《성무일도서》를, 1570년에는 《미사경본》을 출판하였다.

교황 비오 5세가 가장 야심적으로 성공시킨 일은 튀르키예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 에스파냐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한 것이었다. 1570년 솔리만 2세가 키프로스를 공격하여 서유럽 그리스도교 전체를 위협하자,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연합군은 1571년 10월 7일 고린토 만에서 튀르키예군과 대적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큰 승리를 얻어 지중해에서 튀르키예인들의 우위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교황은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선포하였고, 훗날 이 축일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에 의해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572년 5월 1일 “오 주여, 저에게 고통과 인내를 더하여 주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