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좌

이광좌

[ 李光佐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727년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경종실록》, 《숙종실록》, <보유편>의 편찬을 맡았으며, 영조에게 탕평을 상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출생-사망 1674 ~ 1740
본관 경주(慶州)
상보(尙輔)
운곡(雲谷), 문충(文忠)
활동분야 정치
주요작품 《운곡실기(雲谷實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97년 부수찬(副修撰), 1708년 전라도관찰사 ·이조참의를 거쳐 1715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숙종이 소론(少論)을 배척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1718년 예조참판에 다시 등용되어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이 되었다. 사직(司直)에 재직 중 같은 해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여 경종에게 이를 취소하게 한 뒤에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노론(老論)을 제거, 소론이 정권을 잡자 예조판서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 병조판서 겸 원접사(兵曹判書兼遠接使)가 되고 1723년 우의정, 1725년(영조 1) 영의정에 승진되었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영의정에 복귀, 실록청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경종실록(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보유편(補遺篇)>의 편찬을 맡았다. 영조에게 탕평(蕩平)을 상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방지하였으며,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37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박동준(朴東俊)의 모함으로 격분하여 단식하다가 죽었다. 소론으로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때 관직이 추탈되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있다.  1908년(순종 2)에 복관되었는데, 복관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조항목

나주벽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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