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

윤선거

[ 尹宣擧 ]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출생-사망 1610 ~ 1669
본관 파평(坡平)
길보(吉甫)
미촌(美村)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문경(文敬)
활동분야 성리학, 정치
주요저서 《계갑록(癸甲錄)》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
주요작품 문집 《노서유고》 《노서일기》, 글씨 《김집묘갈(金集墓喝)》

본관 파평(坡平). 자 길보(吉甫). 호 미촌(美村)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시호 문경(文敬). 증(拯)의 아버지. 1633년(인조 11) 생원시 ·진사시에 급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하자, 유생의 소두(疏頭)로서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기 위해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켰으며, 성이 함락되자 평민을 가장하여 탈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든 관직에서 사퇴하여,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성리학에는 당대의 대가였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절친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주자의 경전 해석을 두고 학문으로 대립하자, 윤휴의 입장을 옹호하여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와 강화도에서 자결하지 않고 살아돌아온 것을 두고 맹비난하였다. 죽은 뒤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墓碣)을 청탁하였으나 송시열이 이를 무성의하게 처리하자 윤증과 송시열 간 감정대립이 격화되어, 서인이 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분파되어 조선 중기의 당쟁은 서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론과 소론이 싸움을 벌여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722년(경종 2)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노서유고》 《노서일기》, 저서에 《계갑록(癸甲錄)》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 글씨에 《김집묘갈(金集墓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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